세계4대진미_돼지국밥 2021. 7. 19. 01:03

2장.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
◎ 태양을 삼키라는 요구
# p.98~103 (본문의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한 것입니다.)

천재성을 증명하는 일이 천재성을 한층 더 증명해야 함을 뜻할 때, 그것은 더 큰 압박감을, 따라서 더 큰 어려움을 준다. 그것은 CEO에게는 이익을 더욱 증대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운동선수에게는 타이틀 방어의 압박감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2008년 올림픽에서 8개의 금메달을 딴 마이클 펠프스가 받은 압박감이 그런 것이다. 이런 압박감의 짐은 엘리자베스 길버트(Elizabeth M. Gilbert)가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나서부터 맞닥뜨린 것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말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생각 덕에 개별적 인간 존재는 우주의 중심에, 즉 모든 신과 신비를 넘어선 곳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 이것이 바로 합리적 휴머니즘(인간이성 중심주의)의 시작입니다. 이제 창조성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아에서 나온다고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이런저런 예술가들이 천재로서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이 큰 오류라고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누군가에게 그가 모든 신비의 원천, 즉 신성하고 창조적이고 알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의 원천이라고 믿게 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 영혼에게 너무나 큰 책임을 지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태양을 삼키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요구는 자아를 비틀고 왜곡하며, 수행하기 어려운 기대감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이런 압박감이 지난 500년 간 우리 예술가들을 죽여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이카루스의 날개 ( 출처 : https://www.baylorschool.org/periaktoi-home/writing/post/~board/writing/post/i-believe-icarus-was-right )

# 감상
오늘 가장 묵직하게 다가왔던 내용이다.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하여 근대 이후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인주의, 합리주의에 기반한 사고방식으로부터, 고전적이면서 새롭기도 한 이해방식으로 어느정도 형태 전환(Gestalt shift, p.102)을 한 듯하다

한 사람의 성취를 두고 그 사람의 노력과 능력에서 그 원천을 찾는 것이 대개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지난 시험에서는 100점을 받았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90점을 받고 나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자책감이 그 방증이다. "그때는 운빨이었네?" 라는 식의 비웃음 또는 실망 섞인 타인의 시선이라는 몰매를 '미리 맞는 것'도 마찬가지다. 알맞은 답안을 고르는 것, 문제풀이를 위한 공부를 충분히 해놓는 것, 이 모든 선택이 자신의 몫이므로 책임도 온전히 자신에게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합리적인 요소로 여겨지는 어떤 현상이든 성취의 원인 분석에 끼어들 틈이 없다. "나 이번에는 문제 찍은 게 다 틀렸네."라고 말하는 사람이면 몰라도, "나 저번에는 갑자기 막 삘이 꽂혀서 다 술술 풀렸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은 터무니 없는 핑계를 대는 것처럼 들린다.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외부 요소로부터 정말로 특별한 기운을 받았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자기 앞에 놓인 과제 및 문제풀이를 대하는 사고 방식이 의식 가능한 합리성의 영역에 딱 버티고 서 있다. 번뜩이는 발상이 내게 나타났는지의 여부를 오답노트에 기록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비합리적, 비생산적, 감상적인 원인 분석은 설 자리가 없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라는 현상을 스스로 인식하더라도, 그것은 '부수적인 환경' 정도로만 여겨질 뿐, 자신의 결과물 및 답안이 완성되기까지의 합리적인 사고 과정을 '성취로 향하는 본질적인 길'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와닿기 마련이다. 이것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합리적 휴머니즘의 시작과 함께 우리에게 익숙하게 자리잡은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이 사고방식이 충분한 근거와 성찰 없이 받아들인 익숙함이라면? 서커스단의 아기 코끼리는 어려서부터 땅에 박힌 말뚝과 연결된 족쇄를 한쪽 발에 감은 채 길들여진다. 그러다 자신의 완력만으로도 충분히 말뚝을 뽑아낼 수 있는 어른 코끼리가 되어서도 그럴 생각조차 못 한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의 존재를 의식조차 못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억압과 해방 중 자신에게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에 대한 판단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판단 능력의 결여다. 우리가 무기력이라 부르는 것들 중 한 가지이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에 책임질 것을 요구받는다. 그 요구가 내면의 목소리든, 타자의 목소리든 말이다. 그것을 이행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곧 '자신의 책임을 확장하는 자세'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결과의 모든 요소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고통스러워하는 행태는 합리적으로 보면 비효율적인 낭비이고, 인간적으로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적절한 양의 책임은 어떤 기준으로 책정할 수 있을까? 너무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책임만 부담하는 사고방식은 무엇일까? 글쎄... 아마 이 책을 더 읽다 보면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의 어린이들 머릿속 전구의 필라멘트를 가장 먼저 밝히는 천재...라고 짐작하는 토마스 에디슨(Thomas A. Edison)의 명언이 떠오른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


에디슨이 수천 장의 노트를 남기며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견딘 것을 노력에 많이들 빗댄다. 하지만 감히 짐작하건대, 에디슨이 오직 자신의 노력만 인식했다면 그만큼 누적되는 실패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감이 두뇌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가 갑자기 번뜩이는 강렬한 발상인지, 아니면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개며 내리쬐는 찬란한 태양빛과 함께 나타나는 계시인지, 도대체 실체가 있는 것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상학적으로 그것을 체험한 경험에 기인하여, 영감의 필요성을 100분의 1만큼이라도 상정해놓았던 것이 에디슨의 지속 가능한 노력에 커다란 힘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