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4대진미_돼지국밥 2022. 8. 29. 23:59

지난 금요일 나스닥 차트가 폭포수마냥 떨어졌고, 오늘 코스피 차트는 궤적조차 없이 아래로 순간이동 했다. 그것을 보고 심장이 철렁한 개미는 소유하고 있던 주식을 전량매도했다. 10% 안팎의 손절컷을 두고 있는 그 개미의 거래 내역에는 지난 1년간 자잘한 마이너스로 가득하며, 그것이 커켜이 쌓여 이제는 적잖은 손실만이 남아있다.

손절이냐, 존버냐. 손절은 대상을 계속 붙잡을 때 발생할 기대수익이 마이너스일 때 하는 것이고, 존버는 플러스일 때 한다. 기대수익이라는 개념이 오직 돈에만 국한한 것일 수도 있고, 모종의 신념이나 애착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을 주식 매매를 결정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선택의 순간에도 계속 차용한다면,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까?

기대수익은 주관적으로 책정된다. 대상을 멀리하고픈 마음이라면 대상의 단점만 부각될 것이다. 다르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대상의 단점이 거슬리니까 대상을 멀리하고 싶은 거라고.

그런데 문제는 ‘닭이냐 달걀이냐’ 논쟁과는 별개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증편향’이라는 녀석이 독단적인 선택과 비뚤어진 자의식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언젠가부터 단점만 바라보는 짧은 눈동자 속에 비친 대상은, 말도 섞기 싫은 사람, 가고 싶지 않은 장소, 피하고만 싶은 상황이 되어버린다.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자료와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몸부림 속에 치명적인 비합리성이 깃들 수 있는 셈이다.

나는 평일 5시마다 문을 열러 가는 가게가 싫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떠올린 10년 뒤의 나는 가게 문을 영영 닫아도 되게 하는 사람이었지, 가게 문이라도 대신 열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꿀 같은 저녁 시간이 캘린더에서 사라지는 것도 여전히 달갑지 않다. 무엇보다 가게에 있으면 찾아드는 기시감이 끔찍하다. 앞으로도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

2년 전 기꺼운 마음으로 시작한 가게 일 돕기였지만, 1년 전부터 나는 가게에서 마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가게 문 앞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일수꾼들이 던지고 간 종이에도 심기가 불편하고, 손님들의 웃는 얼굴에도 왠지 씁쓸함이 베어 있는 듯 보였으며, 가게 안이 왁자지껄하면 시끄러워서 화가 나고, 적막하면 휑해서 화가 났다.

그럼에도 오늘 가게를 갈 수밖에 없었던 것, 앞으로 한동안 계속 가게를 가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한층 더 못난 놈으로 만들었다. 결국 능력이 모자라서 내가 원하는 선택도 못 하는구나.

못난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들 노릇 하기 위해서 놓을 수 없는 이 책임이 너무나 큰 부담을 주고 있다. 그런데 그 부담은 과장된 것이다. 가게는 멀뚱히 선 채로 십 여년 간 그 자리에 서 있지만, 거기에 온갖 단점들로 살을 붙인 건 나의 비뚤어진 마음이다. 그래서 가게가 감당하기 싫은 마음의 짐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게 참 놀라울 따름이다.

여전히 가게는 우리 가족에게 필수 요소이고, 존재 자체로 행운이며, 앞으로도 함께 가야 하는 대상이다. 세 단락에 걸쳐 늘어놓은 불평은 가게의 단점이 아니라, 내가 잡은 트집이라고 봐야 공정하다. 그리고 색안경을 벗어야, 매일을 그곳에서 보내는 내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도망치는 것이 딱 한 번 허용된다면, 그건 가게라는 장소, 그 속의 나, 반복되는 일상의 불만족이 아니라, 확증편향으로 가득한 잣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어야 한다. 앞으로 나의 삶은, 주식처럼 유동성이 높은 것들보다는, 가게처럼 탈부착이 어려운 중요한 것들로 가득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