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빛난다 # 2
「모든 것은 빛난다」(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1명, 김동규 역, 사월의책)
# 연상되는 노래 : https://youtu.be/qYWslCdU77c
3장. 신들로 가득한 세상
◎ 호메로스가 헬레네를 숭배한 까닭
# p.112~114 (본문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그것은 우리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서, 우리들 현대인은 내적인 자기응시에만 익숙한 나머지 우리의 정조들(moods)을 지극히 사적인 경험으로만 간주한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자기 자신을 내적인 경험과 신념을 통해서 이해하기보다는 널리 공유된 정조들에 휩싸여 사는 존재로 간주했다. 호메로스에게 정조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우리가 함께 처해 있는 상황을 비춰주기 때문이다. 정조는 그 순간 가장 문제시되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영웅적이고 열정적인 행위를 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정조들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신들이다. 신들은 각기 상이한 정조들을 비춰주며, 역할이 어긋났을 때조차 왜 상황이 어긋났는지를 밝혀준다.
헬레네와 가장 조율이 잘 되는 신은 아프로디테였다. 아프로디테는 그 상황에서 에로틱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 가능성을 최고로 펼칠 수 있도록 이끄는 신이다. 대조적으로 아킬레우스는 아레스 신의 정조, 즉 공격적 정조에 민감한 인물이다. 용맹한 전사로서 빛을 발할 기회가 왔을 때, 이 정조는 주어진 상황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부각시켜 준다. 다른 신들은 또 다른 조율을 해준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훌륭한 삶이란 이런 신들과 동조(sync) 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호메로스의) 신들을 조율자라고 부른다면, (···)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문제 상황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가장 훌륭한 삶은 그것과 조율을 이루는 삶이라는 생각이 핵심을 이룬다. 이런 시각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호메로스가 그려낸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부여해준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실존의 기쁨과 슬픔을 보증해주는 성스러움 말이다. 이 호메로스의 신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신이 죽은 이 시대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일신주의의 몰락에서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방법이며, 허무주의적인 실존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법이다.
역자 주) '정조'는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단어로서 하이데거 철학의 'Stimmung' 개념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기분, 분위기, 느낌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이성뿐 아니라 감성 역시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며, 나아가 진리를 드러내는 주요 통로임을 말해주는 용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정조는 인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것으로서 단지 공허하고 변덕스런 기분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특정 상황을 드러내는 존재의 목소리(Stimme)이다. 저자들은 이렇듯 하이데거를 원용해서, 정조가 한 사람의 행동을 즉각적으로 결정하는(bestimmen) 힘의 원천이자, 오래전부터 공유되어 온 문화의 감성적 측면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 감상
'정조'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포착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유일신을 숭배하는 중세 교회의 봉건제가 인간 이성의 혁명을 진압하지 못하고 근대 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준 이후 지금까지, 인간의 이성이 신을 대체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처럼, 인간은 신의 손길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개체로서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내린 선택을 자신과 타자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그것이 불러오게 될 책임을 마주할 때 "내가 왜 그랬지?" 하며 지난날의 자신을 탓하지 않기 위해, 타당한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 근거의 도출 과정은 이성적이어야 하지, 감성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자연과학의 합법칙성, 인간행동의 합목적성은 사실 관계의 발견이지만, 이성으로 발명한 일종의 논리 체계를 이루는 요소다. 그리고 학교에서, 사회에서 마땅히 경험하는 모든 배움이 그 체계에 속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배운다. 나비 효과라는 말은 인과 관계 규명의 복잡다단함을 의미할 뿐이지, 그 효과를 목도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현상의 본질을 찾으려는 대안적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최대한, 나와 너의 두뇌를 이해시킬 수 있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찾으려 애쓰기를 지속한다. 그 '할 수 있음'의 범위가 늘어나는 것이 바로 인간 이성의 확대이다. 집단지성이 발전하는 것처럼, 사회화되는 개인의 이성도 발전한다. 학생으로서 인류 문명의 이성적인 발자취를 배우고 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된 지식을 배우고, 또한 그렇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두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사람을 볼 때에도 그렇게 바라보고 해석하는게 익숙하고 편리한가 보다. 나 자신을 바라볼 때조차도.
나는 올해 초에 진로를 급선회했다. 이전까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중학교 사회 시간에 처음 경제 과목의 매력에 빠진 뒤로, 미우나 고우나 초지일관으로 밀고 나아가서, 경제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지난 10년간 내가 그렸던 미래의 내 모습이다. 하지만 처음과는 전혀 다른 뜻을 품기 시작한 그때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강렬해서 내가 경제학도의 길을 계속 가야하는 갖은 명분들은 미련으로, 잘 쳐줘 봐야 매몰비용으로 보였다. 그때 이 책이 떠오르기도 했다. 순간의 이끌림이 너무나 확실해서 나는 그 자리에서 방향을 틀기로 결심했다. 만약 경제학계에서 감성적인 측면의 확실함도 기회비용으로 쳐준다면, 나는 나무랄 데 없이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일 테다. 그러나 앞 문장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If it were ~' 가정법을 써야 맞을 것이다. 즉 앞의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강렬하고 확실했던 그 느낌은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서 전혀 설득력이 없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급발진했어..ㅎㅎ"라고 둘러대는 편이었다. 누군가 내가 그렇게 선택한 (그럴듯한) 이유를 묻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섬광 같은 순간의 번뜩임인지, 아주 잠깐 찾아왔다 떠나가는 하늘의 계시인지 모를 그 느낌이 옅어지다 보니 불확실함이 점차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기서 나를 달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수십 가지의 타당한 이유를 떠올렸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니까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되고 싶은 직업은 있지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적어도 경제 분야에는 없다' 등등. 근거라고 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떳떳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불안과 불신에 대처하는 익숙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록 말로는 이성적인 척하고 있더라도, 나를 움직였던 그 감성적인 목소리는 잊을 수 없다. 그게 급발진 당시 내게 찾아온 현상 그 자체였고, 지금까지 기억하는 나만의 정황적 진실이므로.
이 책을 더 몰입해서 읽고 머릿속에 깊이 새긴다면, 그 당시의 내 선택을 남에게 납득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일관된 언어로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내 설명을 마음의 변덕이나 일시적인 충동, 부실한 변명으로 일축하더라도 괜찮다. 이 책을 다시 읽고 마치 선물처럼 받은 '정조'에 관한 배움 덕택에,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그 당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지금까지 이행하고 있는 내 선택에 떳떳하다. 앞으로 그 선택이 옳았음을 최선을 다해 증명해 보이는 일만 남았다.
물론 이 책 말미에 있는 저자의 조심스러운 조언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끝까지 정독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겠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독자가 자신의 그릇된 선택을 두둔할 핑계를 찾아도 된다는 값싼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독자가 실존적 문제의 해답을 (제한된 영역에서 너무나 완결되어 있어 의심의 여지가 쉽게 안 보이는) 이성적 사고에서만 찾지 않아도 된다는, 실로 가치 있는 깨달음이다.
'이성적인 좌뇌, 감성적인 우뇌'라는 말이 떠오른다. 너무 이성적으로만 자기 앞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행태는, 근본적으로 반쪽 짜리 인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