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지나가는 시기? 언제든 맞닥뜨리는 시기. <인턴>
# 연상되는 음악
"꿈과 책과 힘과 벽" - 잔나비
"아마추어" - 이승철
# 어쩌다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가
종강이 어느덧 보름 전의 일이 된 오늘, 지난 2주가 어땠는지 돌아봤다. 친구들을 만나는 몇 번의 시간들 말고는 대개 영혼 없이 보냈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자책을 피하고 싶어서 마련한 몇 가지 습관만 건성으로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과제 말고 다른 것으로도 내 하루를 채울 자유가 생겼는데, 오히려 내 마음 속 느낌표는 옅어져 갔다. 익숙한 일이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 걸까. 마음 속 어딘가 빈 틈이 생겨버린 걸까. 이런 의문의 미로 속에서 벗어나려면 길을 찾아 헤매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을 일단 하면 된다...고 하더라. 이틀 전, 앱 개발을 하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나도 이끌려서 여러가지 알아보고 개발 환경을 설치해 놓았다. 기본서 느낌으로 볼 만한 책도 알아놨으니, 오늘 학교 도서관에 가서 빌려 읽으면 되겠다 싶었다. 장맛비가 오는 중이라 고민이 되었지만, 그 고민을 이겨내는 내 모습에 뿌듯해 하며 나갈 준비를 하다가 아차... 토요일은 1시까지 운영한다는 걸 깨달은 시각이 1시 10분 전이었다. 나한테 전용기가 있어서 그걸 타고 가더라도, 마땅한 곳에 착륙하다가 늦을 시간이었다. 그렇게 의욕이 떨어졌다. 역시 익숙한 일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지금의 고민과 다짐이 무색한 하루를 보냈다. 밤잠에 들기 아쉬워 블랑 한 캔 까고 넷플릭스에 들어가 '뭐 볼 거 없나' 하다가 이 사진 속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엔딩 크레딧을 마주하며 떠오른 생각
누군가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로버트 드니로 같은 사람으로 있어주고 싶다. 마음을 좇는 일, 물론 낭만적이고 가슴이 뛰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초등학생 때 도덕 교과서에서 '역할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생이 되고 경제학원론에서 '제약 조건'이라는 이름으로 배웠던 수많은 어려움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을 머금은 공기만큼 일상을 무겁게 만드는 것들. 그 일상의 무게는 '나 혼자'라는 생각을 만나면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가 삶의 무게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 악물고 열정을 불태운다면, 침울한 정조가 곳곳에 퍼져 내 몸과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열정은 축축한 정서를 어느 한 구석으로 잠시 몰아낼 뿐, 어느새 경주마가 되어서는 나중에 벽에 부딪힐 때 더 크게 다치고 만다. 영화 속 앤 해서웨이가 꼭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고, 때마침 로버트 드니로가 그녀의 삶에 나타나 주었다. 노년의 70대 인턴은 꿈과 현실의 마찰이 빚은 혼란을 워커홀릭으로 애써 외면하던 30대 CEO의 일상에 점차 스며들었고, 그녀가 몰아냈던 삶의 어려움들을 함께 마주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기가 손길이 닿는 한 그녀의 행복을 위해 힘써 주었다.
로버트 드니로가 앤 해서웨이에게 한 모든 것, 그것도 일종의 열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열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기나긴 세월동안 쌓은 경험, 그것으로 다져진 섬세한 감각이 있었다. 이것이 프로의식이 투철한 CEO가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 참여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열정이 너무 과하면 뜨거운데 정작 자신은 그것을 모른다. 오직 자신에게 손이 닿은 다른 사람만이 깜짝 놀라서 손을 뗄 뿐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부담스럽지 않게 표현하는 것. 나 자신의 문제와 함께 계속 풀어 나가야 할 숙제다.
# 어쩌면 모두가 시니어 인턴이 되고 있는 것 아닐까
프로페셔널이라던지 베테랑, 전문가라는 표현은 자신감을 주는 한편 부담감을 준다고 본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경험 속에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많은 영역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실수하지 말아야 하는 것 같다. 다들 그런 의미에서 "나이값 좀 해라"는 말을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자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든지 간에, 지금 이 순간 맞닥뜨리는 문제 상황은 늘 처음 겪는 일이다. 그때그때 내가 처한 외부 환경, 고려 사항, 마음 상태는 다르기 마련이니까. 직업 세계에서 프로페셔널은 마땅히 요구되는 것이지만, 자기 세계에서 그것은 너무 가혹한 요구가 아닐까? 우리 모두 '오늘 나의 하루'라는 회사에 처음 들어온 인턴인 것이다.
70대 인턴처럼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일상과 삶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감각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항상 차분한 미소와 침착한 언행을 잃지 않는 로버트 드니로가 이따금씩 안절부절 못하거나 눈물을 보이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도전 정신, 자신의 책임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을 유지하는 자기 관리, 그런 삶의 자세가 무르익어 세상 따뜻하고 든든한 로버트 드니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눈으로 보기에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가히 탈인간급이다. 이런 평가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대단하고 멋져 보였다. '멋진 사람'이라기 보다 '멋진 태도'라고 보고 싶다. 그렇게 점철된 태도가 바로 한 사람의 내공이고, 다양한 상황을 대처하는 익숙한 방식이 되는 것 아닐까.
나를 괴롭히는 다양한 역할 갈등과 제약 조건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어버리지 말기'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 영화에서 찾았다. 내가 바라는 바를 현실에 이끌어내는 과정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을 살피고, 내가 추구해온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무엇이 그것을 위협하는지를 되짚어보는 일이 필요하다. 명시적인 일거리가 없는 인턴일지라도 암묵적으로 해야 할 제1우선순위 과업이 바로 그것이다. 함께 해줄 동반자가 있다면,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