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여유 한 술 뜨는 숟가락

마음 속의 북극성은 실재일까, 당위일까?

세계4대진미_돼지국밥 2021. 11. 16. 03:04

 위병소 밖으로 다시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그리고 내가 추구할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에 대해 한창 고민을 많이 하던 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글이다. 정말 독일의 시인 릴케가 남긴 말인지는 검색으로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튼 내가 봤던 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 글에 힘을 얻긴 했으나, 그동안 이 글을 꾸준히 믿어오기는 했는지, 그 이전에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긴 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구할 수 없는 답을 찾지 마라.
그 답대로 살 수 없을 테니까.
핵심은 전부를 사는 것.
지금 그 질문대로 사는 것.

그렇게 한다면,
먼 훗날 언젠가,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당신은 어느새 그 답대로 살고 있을 것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종류의 명언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말은 쉽지..." 그런데 이 글만큼은 그런 생각이 안 든다. 왜냐하면 말이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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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 떠오르는 질문들에 골몰하며 참 많은 면에서 나는 변화해왔다. 같은 일을 맞닥뜨리더라도 그것을 대하는 방식은 5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많이 다르다. 순간을 음미하는 법, 순간에 만족하는 법, 순간을 가져다 준 무언가(우연, 운명, 선택 등)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이전보다 더 넓고 깊은 곳에서 긍정적인 의미와 즐거움을 발견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지켜가기도 했다. 그러나 실재를 받아들이는 방식만이 달라졌을 뿐, 실재 자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매년 연말이 다가올 때면 만연해 있는 기시감도 그 때문일 테다.

 

 무언가를 다르게 보자고 결정했을 뿐, 무언가를 직접 다르게 만들려는 선택은 되도록 피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사실만 놓고 봤을 때, 지금의 나는 5년 전과 별다른 것이 없다. '별다를 것 없음'을 유지하는 내 행동 양식도 나름의 당위성만 얻었을 뿐, 익숙한 실재에 고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하다. '내세울 것 없음'이 자신감을 갉아 먹고, 나로부터 무언가를 관철하기 보다는, 외부의 무언가에 자연스럽게 융화되려고 하는 성격에 머무르는 것도 악순환이지 싶다.

 

 문학은 실재(sein)로 이뤄지고, 도덕은 당위(sollen)로 구성된다. '~해야 한다'라는 당위는 실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 또는 실재를 성찰할 때의 기준점이 된다. 한 인간의 삶을 놓고 보면, 그것은 목적의식과 비슷한 의미인 듯하다. 하지만 그 낱말이 주는 어감에는 차이가 있다. 당위는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하면 잘못된 것이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목적의식은 '~는 해야 하는 일이면서, 그렇게 하길 원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 싶은 목적의식. 그 개념 자체에 실존적인 의미를 너무 부여하다 보면 그것이 어느새 무거운 당위가 되고 만다. 그 당위와 실제의 삶이 빚어내는 불합치가 심각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마치 삶 전체가 무너지고 자아가 뒤틀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런 종류의 심각함에 쓸데없이 지치는 일이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내 실재가 천천히 걷는 동안, 내 당위는 너무 빨리 날라갔다. 그렇게 벌어진 격차 때문에 내가 인식하는 삶이 나날이 무거움을 더하고, 하루가 나를 짓눌러 못 살게 구는 듯 여겨졌지 싶다. 그 와중에 버릇은 몸에 편안함을, 합리화는 머리에 안도감을 줬지만, 이 모든 머뭇거림과 방황은 결국 모두를 힘들게 했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이제는, 답안을 제출해야 할 때니까, 뭐라도 써서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