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놓아둔 여백의 미를 집는 젓가락

도니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세계4대진미_돼지국밥 2021. 11. 30. 03:31

하나뿐인 인생, 그 소중한 생애 중 가장 활력과 생기 넘치는 시기라고 여겨지는 청춘. 청춘은 젊음을 상징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20대 시절을 가리킨다. 그 청춘을 지나고 있는 나는, 나중에 중년이 되면 꼭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법한 이 시기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보다 '이 청춘을 어떻게 사용해야 후회를 남기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훨씬 더 와 닿는다. 아무래도 인생의 끝을 가리키는 죽음보다는 청춘의 끝이 시간적으로 훨씬 더 가까이 있다고 봐서 그런 것 같다. 청춘을 특정 숫자로 정해진 시기가 아니라, 일종의 라이프스타일로 볼 수도 있겠다. "아주버님 참 젊게 사시네요~ 아직 청춘이신가 봐요." 할 때의 그 청춘 말이다. 이렇게 유연한 정의를 내리더라도, 언젠가는 청춘을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이 올 것만 같다. 신체의 노화, 사회·경제적 책임, 상식적·표준적인 사회문화적 잣대 등 나를 제약하는 요소들의 영향력은 나이를 먹을수록 강화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요소들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바람이라는 걸 체감하는 요즘이다.

청춘의 유한성을 염두에 두고, 오늘 하루에 청춘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면, 그것이 너무 소중하다 못해 부담스럽게까지 느껴질 때가 있다. '훗날 돌아봤을 때 오늘 지나간 하루는 의미있는 경험이었을까? 아니 최소한 기억에 남기라도 할까?' 이런 자문은 잠을 쫓아내는 주범 중 가장 악질이다. 하지만 이런 물음을 한 번도 안 던져 본 사람은 있을지라도, 한 번만 던져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청춘을 떠나보낼 때나 이미 떠나온 이후의 시점에 추억할 만한 이야기가 있어야 슬픔을 견디거나 잊을 수 있을 테니. 이같은 청춘의 유한성이 언젠가 불러일으킬 비탄을 초월하고자 애쓴 사람이 있다. 19세기 영국의 귀족 신분에 부자이기까지 하면서, 모두가 아름답고 매혹적이라며 찬탄하는 외모까지 겸비한, 도리언 그레이 씨다. 이 책은 그가 영원한 젊음(청춘)을 지키려는 투쟁을 다룬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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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평론가, 소설가, 극작가로 이름을 떨친 와일드가 쓴 단 한 편의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세계관과 예술관이 집약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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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고 '도리언 그레이 씨가 청춘(젊음)을 다르게 정의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쾌락을 추구할 무한한 자유, 그리고 자격'이라는 좁은 의미에만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와 자격을 지탱해주는 책임과 양심'까지도 직면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 책은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젊게 사시네요.” 라는 말에 ‘나이에 안 맞게 철없이 구는 사람’이라는 비아냥이 섞이지 않았을 테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니, 어디선가 들었던 청춘의 의미가 떠올랐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무책임한 행동이 낳는 결과를 통해, 양심의 가책이 주는 아픔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무한한 권리. 내가 보였던 한계만 가지고 재단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충실히 대하고 극복하는 과정까지 봐야만, 내 청춘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있겠다.

내 또래 중 한 친구는 한창 취업을 준비하는 이 시기를 '20대의 암흑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뭘 해도 답을 찾기 어려운 이 시기, 미래를 준비하기 바쁘면서도, 현재의 순간을 채울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아 아깝기도 하다. 하지만 청춘이 영원하길 바라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마냥 아픔 없는 즐거움뿐이길 바라는 건 과욕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나름대로 광명을 찾은 것 같아 한결 부담을 덜었다.


# 인상 깊은 문장, 그리고 위험한 문장

46p. "영혼은 관능으로만 치유될 수 있으니까. 관능이 영혼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처럼."
79p.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비굴한 상식 때문에 죽어 가고, 우리가 결코 후회하지 않는 건 우리의 실수라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한참 늦은 다음이지요."
353p. "삶을 예술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면 두뇌가 바로 심장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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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매력: 평면적인 두 인물(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사람.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 중 하나가 '노진구'의 내적 갈등 장면이다. 도라에몽의 "나 없는 동안 이 도구 절대로 만지면 안 돼 진구야!", 진구 엄마의 "진구야 팥빵 놔두고 갈 테니 이따 도라에몽이랑 같이 먹어~" 같은 대사와 함께 곧바로 시작되는 '쾌락주의 노진구'와 '양심주의 노진구'의 3분 토론. 각자 왼쪽 말풍선과 오른쪽 말풍선에 자리잡고 악마와 천사 머리띠를 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같은 연출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쾌락을 대놓고 부추기는 이웃 헨리 워튼 경, 양심을 넌지시 보여주는 화가 바질 홀워드 씨와 그의 작품,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도리언 그레이 씨. 진구의 결심은 언제나 암을 유발했는데, 도리언 그레이 씨의 고민은 항상 호기심을 유발했다. 그런 연출이 한 사람의 변덕과 번뇌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