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놓아둔 여백의 미를 집는 젓가락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

세계4대진미_돼지국밥 2022. 2. 24.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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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삶과 죽음에 대한 마지막 인생 수업이 시대의 대표지성 이어령이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가장 지혜로운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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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듣고 쓰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감상문

 

 # 바보의 쓸모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중략)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꿈에서 깨면 죽는 거야. (176p)

 

망상인가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꿈만 꾸는 나에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같은 첫인상이라 아주 반가운 구절이었다. 꿈을 계속 부여잡고 있는 것, 설령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끝'이 전혀 보이지 않더라도 괜찮다. 멀리 있다는 것은 아직 꿈 속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 당분간은 큰 걱정 없이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이같은 자기 최면에 가까운 합리화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걸, 몇 번 곱씹어 읽고 나서야 알았다.

 

'꿈'은 하나뿐인 삶의 종착지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삶의 경유지들이다. 이어령 선생은 꿈을 여행에 비유한다. '서울에 가는 것'이 꿈일 때, 기차 타고 잠깐 눈 붙이고 났더니 서울역에 도착해 있는 것과,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서울을 향해 자신의 여정을 밟아가는 것 중 무엇을 택하겠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결과로서의 꿈이냐, 과정으로서의 꿈이냐. 꿈이라 여겼던 종착지에 도착해보면 그것은 꿈의 바깥에 있다. 반면 꿈을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만나는 경유지들은, 꿈 속에 있는 듯 충만한 의미로 가득하다.

 

'현실이 되지 못하는 꿈은 무의미하다.' 꿈을 평가하거나 비판할 때 흔히 떠오르는 생각이다. 하지만 '실현 여부'가 꿈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비현실성'이라는 잣대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위축시키지 말라는 것. 이어령 선생의 말씀에 그런 경고의 의미도 담겨있지 않았을까 싶다. 꿈을 이뤄서 꿈에서 깨는 것이나 꿈을 포기해서 꿈에서 깨는 것이나, 앞으로 '꿈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꿈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

 

출처: 네이버 영화 -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97858&amp;amp;amp;amp;imageNid=6593846

 

다행히 내 최애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준다. 월터 미티(Walter Mitty)는 잡지사에서 사진 현상 작업을 담당하는 인물로, 수 십년 째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가 그닥 눈에 띄지도 않는 일에서 장인 정신을 발휘해오며, 묵묵히 인내로 버틴 덕분에, 관련 업계 최고 권위자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살면서 해 본 특별한 경험?', '살면서 가 본 곳 중 기억에 남는 곳?'을 묻자 훨씬 더 과묵해지는 그의 입술. 그는 주특기인 '멍 때리며 상상하기'를 시전한다.

 

멀뚱멀뚱 선 채로 꾸던 꿈에서 깨어난 그는 전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그렇게 시작한 여정은 그를 꿈보다 더욱 생생히 꿈 같은 삶으로 이끈다. 임무 완수를 향해 경유지들을 거쳐가는 과정에서 그의 표정은 한결 살아있다. 멍 때릴 때, 멍에서 막 깨어났을 때의 얼 빠진 표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영화의 끝에서 월터 미티는 결국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 순간이 영화의 마지막이지만, 월터 미티라는 한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경유지일 테다. 놀랍게도 영화 내내 그의 상상이 현실로 이뤄지는 일은 없다.

 

그렇다. 월터 미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종착지에 도착하지 않는다. 어쩌면 애초에 종착지라는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한국판 제목보다는, 원제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가 작품의 메시지를 더 잘 설명한다고 본다. '월터 미티비밀스러운 .' 결과를 설명하는 제목이 아니라, 삶 자체를 수식하는 제목이 그의 이야기를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상식적인 잣대로 볼 때 괄목할 만한 성취는 없기에 여전히 눈에 띄지 않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 다른 누구도 아닌 월터 미티 자신이 직접 써내려가는 이야기. 그리고 살아있기 위한 생존이 아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삶의 이야기.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월터 미티의 가계부를 줌인(Zoom-In)하면서 시작된다. 과연 마지막 장면은 무엇을 줌아웃(Zoom-Out)하면서 끝날까?

 

이어령 선생은 리빙(Living)과 라이프(Life)의 차이를 강조하며 전한다.

 

인생도 그렇다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178p)

 

내가 그리는 무늬.

내가 남기는 이야기.

급격하게 요동치는 파도에 뛰어들진 않더라도,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을 자아내며 사는 것,

바로 나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