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법, 영어로는 Law죠. 법은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2년 전, 위드코로나 이후 2번째 학기 개강을 맞아 법경제학 시간에 교수님께서 질문을 던지셨다. 좌중이 숙연해지자 교수님께서는 한 말씀 더 보태셨다. "다들 이러면 제가 직접 호명하는 수밖에 없어요. 오늘은 맨 뒷 번호부터 불러볼까?" 그 순간 느낌이 싸했다. 곧바로 교수님의 입에서 나온 세 글자는 바로 내 이름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대로 말을 했다가는 엄청 더듬을 것 같아서 서둘러 키보드를 두들겨 Zoom 채팅에 남겼다. "다양한 경제주체 간에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성문화된 규칙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요즘 보기 드물게 문어체를 사용하는 학생인데, 대답까지 교과서처럼 하네요." 나는 그 순간 적잖이 뿌듯했다. 평소에 많이 하던 잡생각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구나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마주한 세상은 너무나 복잡한 곳이다. 오지선다형이 아닌 서술형 및 실천형 문제가 나도 모르는 새에 갑자기 주어지기도 하고, 내가 고심 끝에 꺼내놓은 답안이 정답인지도 알 수 없는 곳이다. 이런 뒤죽박죽 세상 속에서 나를 바로 세워줄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시험 문제에 정답이 있듯이, 세상에는 보편타당한 진리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그 시작이었다. 게으른 공상 끝에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규칙을 지키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 규칙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1년 전에 본 드라마에서 한 변호사는 행동으로 반박했다. "규칙만 지켜서는 세상을 옳게 바꿀 수 없다." 빈센조 변호사는 대한민국의 사법 제도는 답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법이 하지 못한 심판을, 마피아의 방식대로, 법정 바깥에서 아주 참신하게 집행했다. 반면 오늘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에서 이상한 변호사는 법을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믿는다. 법 앞에서 거짓되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신념은, 의뢰인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보통 변호사의 책임과 마찰을 빚는다.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는 동안 법은 부조리를 정의롭게 심판하는 데에 실패하기도 한다. 그때 느낀 죄책감과 선배 변호사의 격려는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었고, 마지막에는 그녀의 신념을 관철하는 데에 성공한다.

빈센조의 결말은 드라마 속에서 통쾌했지만 현실에서 씁쓸했다. 결국 법 바깥의 힘 다툼과 치밀한 수읽기가 승패를 좌우한다는 이야기니까. 정보, 자본, 권력 등 온갖 종류의 비대칭성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일은 더욱 어려워 보였다. 반면 우영우의 결말은 드라마 속에서도 현실에도 희망을 준다. 일상의 공간에서는 회전문 하나에도 휘청이던 그녀였다. 여전히 법정 밖 세상에서는 흔들리곤 한다. 그럼에도 법이라는 토양 아래 신념을 단단히 뿌리내린 덕택에, 자신만의 리듬으로 세상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내가 사랑해야 하는 한 사람이 '이게 최선이야'라고 타협하며 저지르는 전혀 선하지 않은 행위를 보며 혼란스러웠다. 그에게 차선책을 마땅히 제시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고, 앞으로의 내 미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겼었다. 현실을 핑계로 한 점 떳떳함 없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우영우는 세상 속 자신이 '조금 이상하고 별나긴 해도,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 말이 왠지 용기를 준다. 그녀가 '뿌듯함'이라고 정의내린 찬란한 미소는, 밥 벌어 먹고 살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나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무언가를 거머쥔 사람의 표정과는 다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켜낸 자의 표정이다.

세상의 불문율에는 아랑곳 않고, 자기 규칙대로만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별나다고 말한다. 세상은 법의 규정성 아래 있지만, 법에 의해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우영우만큼 별나게 살아가긴 힘들 것이다.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 갈 땐 가더라도 뿌듯함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 한 잔의 뿌듯함을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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