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사진 작가 숀 오코넬은, LIFE 잡지사의 마지막 호 표지 사진을 보내며 "거기에 삶의 정수가 들어있다"라고 말한다. 오프라인 LIFE 잡지를 폐간하고 온라인으로 전환하기 위해 파견된 구조조정 책임자는 정수(Quintessence)라는 단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부하 직원이 귀띔해주니까 겨우 본질(Essence)이라고 알아차린다. 하지만 두 단어는 미묘하게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챗지피티에게 물어봤다.

질문 | '본질'과 '정수'라는 두 단어의 뜻은 어떻게 달라?

답변 | 본질빵의 밀가루처럼, 무언가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요소를 말해. 반면 정수가장 훌륭하고 완벽하게 구워진 빵처럼, 무언가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상태를 말해.

 
어라라..? 내가 어림짐작하고 있던 것과 많이 다르네. 그렇다면 내가 요즘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질문들은, 삶의 본질과 정수, 둘 중 무엇에 관한 것일까? 챗지피티의 도움 없이 직접 해 보자.
 

  1. 나의 성장과 커리어, 잠재적 보수를 고려할 때, 지금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까, 이직을 준비해야 할까?
  2. 지금 여러 요인으로 노동시장의 초과 공급이 심각하고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경쟁력을 갖출까?
  3. 부모님께서 더 이상 경제활동을 못하게 되셨을 때에 가족을 무리없이 부양할 수 있으려면, 지금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요약하자면 '시장에서 인정 받고 돈도 많이 벌어서 가족을 든든하게 지탱하는 나'의 '존재 요건'이 무엇일까에 관한 고민이다. '레드오션 마켓에서 끗발 좀 날리는 슈퍼 알파메일'을 삶의 정수라고 간주하자니,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영화의 말미에 포착했던 삶의 정수가 지닌 구체성과 생생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밀가루가 풍족하게 쌓여있는 창고 키를 사막에서 찾아내자는, 본질을 향한 맹목적 구호에 가깝다. 절대 부족할 일 없이 빵을 많이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빵의 풍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무슨 킥을 넣을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는, 안정적인 생존에 한정된 고민이다. 본질을 갖춰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다 보니 요즘 내가 분에 넘치게 머리가 무거웠던 게 아닐까. 어느 길로도 두 발짝 이상 발걸음을 내딛지 못할 만큼.
 
그렇다고 삶의 정수를 찾아보자니 어렵다. 다만 이제는 좀 가벼워진 마음으로 질문에 직면해 볼 수 있겠다. 이 길이 삶의 본질을 채워줄 길이 될지 여부는 미리 알 수 없는 거니까. 본질을 들먹이며 무언가를 망설이거나 주저한다면, 그것은 핑계다. 어떤 선택을 내리더라도, 그 길에 충실한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 그거면 된다. 그 과정에서 마주할 구체적인 내 모습과 경험들 중 일부는 분명히, 삶의 정수가 될 것이다. 먼 훗날 내 주마등에도 삶의 정수가 담긴 사진 한 장 띄울 수 있길 바란다.
 

 
 
삶의 본질을 추구하며 분투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이미 삶의 정수라며 찬사를 건네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떠올리며.

https://www.youtube.com/watch?v=L4KAQVcDbvo&list=RDL4KAQVcDbvo&start_radio=1 

마음이 참 몽글몽글해지는 영상이다. 지금껏 최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습과 행동으로 상황에 적응하려고 했고, 어느샌가 익숙해졌으며,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교수님 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 로봇 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다. '칭찬 맞겠지?' 의문과 함께 어느 정도 만족하는 편이지만, 기왕이면 일상의 사소하면서도 특별한 순간들을 남기고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영화 속 인물들처럼. 그리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처럼.

 

보통은 꿈을 이루기 위해 집을 나서서 길을 걸어가는데,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으며 집을 꿈의 장소로 옮겨놓는다는 발상이 정말 아름다운 영화다.

 

풍선 장인 할아버지의 큼지막한 손가락이 어루만진 문구. 인생이라는 커다란 모험을 함께한 동반자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Thanks for the adventure - now go have a new one!

 

 

고등학교 때는 자기 전에 돌린 롤 랭크 게임에서 지면 잠을 잘 수 없었다. 요즘은 자기 전에 푸는 백준에서 AC를 받지 못하면 잠을 잘 수 없다. 롤은 100% 승부욕 때문이고, 백준은 50% 승부욕 때문이다. 백준에서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지금 풀지 못한 문제가 나의 무능력함을 드러내고, 내가 개발자가 될 지의 여부에 깃든 불확실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머리가 도통 돌아가지 않을 때는 빠르게 놓아주는 편이다. 그게 어제였고, 나는 '오늘은 안 되겠다' 하고 누웠는데, 잠에 들기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봤다.

https://www.netflix.com/browse


# 인상 깊은 대화

스승: 기냥 공식 한 줄 달랑 외워서 풀어버리면 절대 친해질 수가 없는 거야. 살을 부대끼면서 친해져야 이해가 되고, 이해를 하면 사랑할 수 있는 거야.
제자: 그렇다고 일일이 다 계산을 해요?
스승: 계산이 중요한 게 아니야. 생각. 공들여서 천천히. 아주 꼼꼼하게 생각을 하라는 거지.


내가 수능 과목 중에 수학을 가장 좋아했던 이유다. 단순히 수학에 가장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확실함 때문이었다. 그 확실함은 내가 사용하는 공식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고, 내가 접근하는 방식의 논리를 따져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반면 깊이 있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던 국어나 영어를 풀 때 반쯤은 로또 번호를 찍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같은 깨달음을 내 멘티에게도 전해주려고 하는 편이다. 한 번은 멘티가 근의 공식을 외우지 못하고 있길래, 나는 말했다. "근의 공식을 외우는 것도 좋은데, 유도할 줄 알면 까먹어도 괜찮다." 그렇게 같이 근의 공식을 유도했었다. 다음 만남 때 멘티는 '근의 공식을 유도하는 법'을 전교 1등도 모르고 있더라며, 내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 학교 1등도 이거 처음 본다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나는 답했다. "그러면 네가 나중에 걔보다 더 잘할 수 있겠네."

그런데 PS를 할 때면 수학을 공부하며 얻은 깨달음과 거리를 두게 되는 것 같다. 수학자들이 발명한 알고리즘을 얼마나 깊이 이해해야 할까? 내가 수학자가 될 것도 아닌데, 그게 언제 쓰이는지, 그리고 어떻게 구현할지만 알고 있으면 되지 않나? 하지만 사용처와 구현 방법만 아는 알고리즘을 사용할 때 머릿속엔 불안함 한 가득이다. 응용할 엄두도 안 난다. 나는 PS나 개발을 할 때 국어나 영어가 아니라, 수학 문제를 푸는 기분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역시 새로 배우는 지식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게 좋겠다.


스승: 이보라. 수학을 잘하려면은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네?
제자: 머리겠죠, 뭐.
스승: 머리 좋은 아새끼들이 제일 먼저 포기한다.
제자: 그럼 설마 '노력' 이런 거 아니죠?
스승: 그 다음번으로 나자빠지는 놈들이 노력만 하는 놈들이야.
제자: 그럼 뭔데요?
스승: 용기.
제자: 아, 뭐.
'아자, 할 수 있다.'
뭐, 이런 거요?
스승: 고거는 객기고. 문제가 안 풀릴 때는 화를 내거나 포기하는 대신에
'이야, 이거이 문제가 참 어렵구나, 야.'
'내일 아침에 다시 한 번 풀어 봐야 갔구나' 하는 여유로운 마음. 그거이 수학적 용기다. 기렇게 담담하니 꿋꿋하게 하는 놈들이 결국에는 수학을 잘할 수 있는 거야.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이다.
오늘 할 공부는 내일로 미루지 말되,
안 풀리는 문제는 내일로 미루자.

유튜버 진용진 님의 '없는영화'는 볼 때마다, 익숙한 삶의 단면을 정말 잘 녹여낸 작품 세계 속에 몰입하고, 그 여운을 오래 간직하는 편이다. 그의 작품이 이번에는 내가 사회에 갖고 있던 가장 큰 문제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https://youtu.be/MalnKOx5i_Q

정말 이대로 쭉 가면 안 괜찮을 것 같다. 도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린 걸까?

# 소확쾌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며, 가치있는 존재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오프라인에서 이같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선택에는 큰 불확실성이 내재한다. 모종의 위험을 감수하고 시간, 노력 등의 비용을 투자할 대상이 한정적이며, 성패 여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속한 맥락이나 마음 상태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불확실하다. 반면 온라인에서는 누군가에게 "저에게 관심 좀 주십사" 하고 말로 청하는 게 아니라, 일단 글을 써 놓으면 그 글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반응해 준다. 어장이 비교할 바 없이 넓어지므로, 그물에 기꺼이 걸려드는 물고기들도 많아지는 것이다. 심지어 그물을 놓는 데에는 비교할 바 없이 적은 노력이 들어간다. '짧으면 짧을수록 더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이제 인터넷의 법칙으로 자리잡았다. 목 마를 때 당장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물 한 컵 같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공간, 바로 인터넷이다.

# 대의를 위하여!
관심 끌기에 관한 또 한 가지 법칙은 '싸움 구경이 가장 재밌다'이다. 키보드 배틀은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온라인 상에서 익명의 누군가를 잡아다 패면서 풀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용한 게임 방식이다. 하지만 1:1 혹은 소규모 개인 간 다툼에 사람들이 건네는 관심은 점점 사라졌으며 '병먹금'이라는 말과 함께 고갈되었다. 가장 자신 있는 온라인 난투극을 관람해줄 팬을 잃어버린 파이터들은 갖은 프레임과 구호를 빌려오며 '내가 너의 편이 되어서 대신 싸워줄게'를 시전한다. 학벌, 지역, 세대, 성별 등 다양한 프레임으로 진영을 나누고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전까지 오프라인에서 국지적으로만 발생하던 갈등을 온라인 영역까지 끌어들이면서, 키보드 워리어들은 심리적으로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이 '할 짓 없어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시비 걸고 다니는 잡배'가 아니라 '상대 진영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진영을 수호하는 영웅'으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 웬말?
키보드워리어들이 행진할 때 들고가는 깃발에 적힌 학벌, 지역, 세대, 성별 등은 한 개인을 나타내는 범주 또는 개인이 소속된 집단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을 나타내는 이 표식은 거의 바뀔 일이 없다. 지방대 다니다가 수도권 대학에 들어간다거나, 성 전환을 하지 않는 이상. 그래서 개인이 가진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매김한다. 온라인 전쟁터에서 진영을 선택할 자유는 거의 없으며, 내가 속한 진영이 지고 있으면, 우리 편이 지고 있어서 속상하거나, 내가 패자들과 같은 범주 및 집단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불편해지기도 한다. 심지어 스마트폰 보급의 확대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확산을 거치면서, 일상에서 인터넷 공간 속 치열한 공방전을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저 사람들은 할 일이 저렇게도 없나'며 딴 세상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일상 속 너무 많은 순간에 내게 노출되고, 어느새 스며들게 된다. 세상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은데, 우리 편이 지고 있는데 잠자코 있을 수는 없지!

#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인터넷 공간은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배출하는 공간이다. 누가 그러자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익명성이 '그렇게 해도 된다'는 의식을 부추겼다. 아직은 뚱뚱한 CRT 모니터로만 인터넷을 접할 수 있던 그 시절까지는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일상의 점유율, 세상을 이해하는 매체로서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낮았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한낱 쓰레기통에 불과했던 그 공간은 어느새 쓰레기장이 되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무기는 역시 쓰레기다. 그 전쟁에는 누구나 '쓰레기를 정화한다'는 정의감에 참여하지만, 대개는 <무한도전: 의상한 형제들> 특집처럼 '쓰레기 돌리기'에 불과하다.

# 진정한 메타버스
온라인 공간의 흐름이 오프라인 세상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제 한 개인이 저지른 잘못은, 그 개인이 속한 진영을 비난하기에 딱 좋은 재료가 되며, 특정 범주 및 집단의 오점으로 일반화된다. 이제 불확실성과 비용을 감수할 만큼 호감이 가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친구보다 먼, 초면보다는 가까운 사람'에 관한 무지를 소통으로 해소하기 보다는, 그간 인터넷에서 습득한 편견으로 대체한다. 그렇게 어정쩡하게만 아는데 굳이 깊이 알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은, 더욱 더 경계의 대상이 된다. 아담 스미스는 말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빵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제빵사들의 헌신 덕택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간편하고 위험부담 없이 쾌락을 얻고자 한 몇몇 사람들의 전쟁놀이 덕택에, 우리는 매일 쓰레기들이 날리는 전쟁터 속에서, 세상에 대한 의식을 형성한다. 적잖은 시간을 그렇게 보낸다. 그러는 와중에 썩은 의식은 일상 속 판단과 행동의 준거가 되어가고 있다.


생각이 더욱 집단화될수록,
개인은 더욱 파편화되고 있는 이 현실.
그 현실을 너무나도 잘 꼬집은 기획이었다.

째깍.
째깍.
잠이 오지 않을 때 의식하게 되면 가장 고통스러운 소리. 아날로그 벽걸이 시계의 초침 소리가 고막을 두들기는 또다른 순간은 바로 시험을 치를 때다. 이때 째깍소리는 저 멀리 강의실 앞에 있는 시계에서 나는 게 아니라, 조급함을 느낀 두뇌가 상황에 맞춰 음성 지원을 해주는 것일 때가 많다. 밤의 째깍 소리는 잠이 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차라리 낫다. 낮에는 그런 방해요소 속에서도 무언가를 해내야 하니까.

https://www.netflix.com/search?q=%ED%8B%B1%ED%8B%B1%EB%B6%90&amp;jbv=81149184



주인공은 30살 생일을 앞두고 째깍 소리에 시달리고 있다. 청춘이 끝났을 때 이뤄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은 그에게 정말이지 끔찍하다. 동시에 주인공은 30살이 되기 전 마지막 뮤지컬 리허설을 준비하며 째깍 소리에 시달리고 있다. 정신은 점점 흐리멍텅해지고 날은 점점 밝아오는데, 아무런 진척이 없다.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되려 하고 있다.

주인공이 겪은 이같은 상황은 많은 경우 다가오는 새해가 달갑지 않은 이유, 떠나가는 오늘을 붙잡고 싶은 이유가 된다. 뒤처지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달아나는 시간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만 같으니까, 시간이 나와 함께 멈춰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순간에도 째깍 소리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들려온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 째깍 소리를 불붙은 심지가 타들어가며 폭발하기 직전의 소리 같다고 말한다. 그는 절박하다. 케이크에 꽂힌 기다란 초 3개에 붙은 불꽃을 끄는 순간이 곧 심판의 날이 될 거니까. 그때도 지난 몇 년과 다름 없는 모습에 머물러 있다면 구원은 없을 테니까. 정말이지 끝장이다.

속이 타 들어가는 긴장 상태. 내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언젠가, 가능한 한 빨리, 새로운 궤도로 도약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살아가고 있다. 지금 내가 선 땅이 더 이상 정상 궤도가 아니라, 도태의 공간이 되는 시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진작에 도래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조너선 라슨의 이야기를 보며, 그 피말리는 순간을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째깍소리에 시달리고 있는 나는, 발사대 위에 오른 로켓인가, 아니면 로켓을 발사대 위에 올려놓은 사람인가?

만약 내가 로켓이면, 카운트다운이 끝났을 때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나는 공중에서 폭사할 것이다. 주인공과 내가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지금 들려오는 카운트다운이 곧 삶의 모든 의미를 앗아가는 시한폭탄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내가 시험대 위에 올랐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며 살아 왔다.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데도 아직까지 잘 살아있는 것을 보면 그 생각이 틀린 게 분명하다. 실제 실패는 항상 기대 보다는 덜 처참했다. 실패의 순간 터져버리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니까.

시험대 위에 오르는 것은 언제나 나의 행동, 작업물,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다. 실패한 사람에게 건네는 물음이 “너 큰일났다. 이제 어떡할래?”가 아니라 “그렇게 돼서 유감이야. 이제 뭐 할거야?”인 것처럼, 다음 로켓을 만들어 쏘아올리면 그만이다.

째깍.
째깍.
커다란 폭발음이 일고 난 뒤에, 질끈 감고 있던 두 눈을 다시 떠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째깍 소리는 시한폭탄이 아니라 로켓 발사대에서 나는 소리였음을.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의 선택 문제, 총알을 보고 피하는 몸동작으로 유명한 영화. 이 영화에서 다루는 철학적 질문과 대답은,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에 관한 호기심을 키운다. 하지만 자기 전에 한 편씩 본다는 것이, 장면들의 색감이 대부분 어둡다 보니 잠이 많이 와서, 다 보는 데에 일주일은 걸린 것 같다.

https://www.netflix.com/browse?jbv=20557937



# 오라클, 스미스, 그리고 네오

오라클은 매트릭스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다. ‘그’의 존재를 믿고, 네오가 바로 ‘그’라고 믿는 모피어스가 네오를 데리고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도 바로 오라클이다. 그녀는 매트릭스를 관통하는 필연을 점지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한 이후로 줄곧 두려움에 시달린다. 자신이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오라클은 네오가 ‘그’가 아니라고 말했고, 네오는 혼란스러워 했다. 전지전능한 예언자의 전망이 같은 길을 개척하는 동료들의 기대와 상충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매트릭스의 의도대로 움직이다가, 자유를 얻어 자신의 목적의식대로 행동하게 된 소프트웨어다. 그는 인간을 혐오하며, 네오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는 한결같이 네오를 Mr.Anderson 이라 부른다. ‘네오’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네오에게서 그 상징성을 제거하면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거대한 시스템에 무력하게 지배당하던 그 인간 말이다.

스미스는 네오에게 묻는다.

왜 포기 않지?
왜 계속 싸우지?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자유, 진리?
평화 혹은 사랑?
다 환상이고 망상이야!
의미 없는 자신의 존재를 합리화하려는 나약한 몸부림이지.
모두 조작된 거야. 매트릭스처럼!
...
왜, 대체 왜 포기 않나?

이런 관점은 오라클에게서 답을 갈구하던 시절의 네오를 겸연쩍게 한다. “오라클은 늘 듣고 싶은 말만 해 준다”라는 나오베의 진술은 이런 관점을 뒷받침한다. 예견된 운명이 한 사람의 주관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것에 운명이라는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런 운명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운명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네오에게 용기의 원천이 되어주던 운명은 매트릭스 시스템 속 전기적 신호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오라클은 운명론의 상징이자, 믿음의 근거를 탐색하는 과 같다. 스미스는 회의론의 상징이자, 믿음의 의미를 부정하는 머리와 같다. 그렇다면 네오는 무엇을 상징할까? 네오는 스미스에게 답한다.

그게 내 선택이야

그는 무얼 믿을지를 선택한다. 그때부터 근거나 의미는 필요치 않게 된다. 오직 믿어야 할 이유만 있을 뿐이다. 모피어스와 트리니티라는 사람, 그리고 "Because 'He' choose to"가 아닌 "Because 'I' choose to."라는 사실. 그 이유라는 것은 마음 속에 있으면서, 마음이 가리킨다. 네오의 답변에 우리말 패치를 적용해 보자.

내 맘이야

 "왜 그러는데?"에 대한 답변 1위. 답하기 귀찮아서 둘러댈 때 쓰는 말이, 어쩌면 정답에 가장 가까운 말일지도 모르겠다.  

 

# ‘매트릭스’의 의미

사진 출처: 구글

정의 1: 무언가가 발전할 때, 그 환경이나 도구로서 기능하는 요소.

예문 1: "자유로운 선택이 인간의 삶을 이루는 matrix다" (출처: Oxford Language)

https://www.netflix.com/search?q=%EC%87%BC%EC%83%9D%ED%81%AC%ED%83%88%EC%B6%9C&amp;amp;jbv=70005379


# 인상 깊은 대사

감방에 처넣어지고 나면
철창이 닫히고
그 순간 실감하게 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예전의 삶은 사라져버리고
과거를 생각해 볼 끝없는 시간만이 남는다.

And when they put you in that cell,
when those bars slam home,
that's when you know it's for real.
Whole life blown away in the blink of an eye.
Nothing left but all the time in the world to think about it.

하지만 잘 알아둬.
이 철책은 웃기지.
처음엔 싫지만
차츰 익숙해지지.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벗어날 수 없어.
그게 '길든다'는 거야.

But I'm telling ya,
these walls are funny.
First ya hate 'em,
then you get used to 'em.
Enough time passes,
you get so you depend on 'em.
That's institutionalized.

후회를 느끼지 않는 날이 없소.
그래야 한다고 당신이 강요했기 때문은 아니오.
옛날의 나를 돌아보지.
젊은... 바보 녀석이 끔찍한 죄를 저지른 거야.
그놈과 말하고 싶어.
정신 차리라고 하고 싶어.
지금 현실을 말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지.
그 젊은 녀석은 오래 전에 없어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

There's not a day goes by
I don't feel regret.
Not because I'm in here and
because you think I should.
I look back on the way I was then.
A young, stupid kid who committed that terrible crime.
I want to talk to him.
I want to try to talk some sense to him.
Tell him the way things are.
But I can't.
That kid's long gone,
and this old man is all that's left.
I gotta live with that.

그 말이 맞아요.
그곳은 멀리 있고
난 여기 있죠.
선택은 하나밖에 없어요.
바쁘게 살든가,
바쁘게 죽든가요.

Yeah, right.
That's the way it is.
It's down there,
and I'm in here.
I guess it comes down to a simple choice, really.
Get busy livin'...
Or get busy dyin'.



# 감상
"새장에 갇혀 살 수 없는 새가 있다." 앤디를 떠올리며 레드가 되뇌인 말이다. 부조리한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이 요구될 때,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새장에 갇혀 살 수 없는 새는 바로 나다.'라는 자각이 우선 필요하다. 그런 자각은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새장 밖에서의 삶을 꿈꾸게 한다. 그로써 살아있음이라는 감각에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자각이 단순한 착각일 뿐이라면? 찬란한 희망이 알고 보니 달콤한 자기기만일 뿐이라면? 고통에 시달릴 것이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을 때부터,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새장에 갇혀 살 수 없는 새가 있다."라는 사실이 잊혀질 때부터, 지금의 모든 게 편해질 것이다. 새장 밖에서의 삶은 이야기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을 뛰게 하는 그것이 희망인지, 기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명백히 주어진 사실도 아니고, 참과 거짓이 분명한 명제도 아니다. 가석방 승인 심사를 받는 것과 달리, 권위를 가진 누군가가 적부를 판정해줄 사안도 아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의 선택은 그가 자기기만 속에 갇혀 지내고 있지 않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보여준 선택은 그가 새장 밖에서 살아야만 하는 새라는 것을 여지 없이 증명한다. 신념에 기반하고 신념의 실현을 추구하는 선택이 없다면, 한낱 망상이었음이 드러날 뿐이다. 영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덤블도어 교장이 남긴 말이 떠오른다.

It is our choices,
that show what we truly are,
far more than our abilities.

우리가 가진 능력보다
우리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한 선택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 중에서 전자를 택하는 것은 얼핏 볼 때는 편리해 보인다. 그게 현재의 상황이고 익숙함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멀리 있는 그곳' 따위 없기 때문에 희망과 자기기만의 경계에서 줄타기 할 위험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멀리 있는 그곳'이 떠오르고, 그곳을 찾아 떠난 늙은 젊은이가 눈에 들어온다. 마냥 편리했던 것이 더 이상 편안하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더 나은 대안의 존재는 불편한 구석에 자리잡는다. 선택할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어디에서 살 것인가. 이곳, 아니면 그곳?"


# 한 줄 감상
성공 여부를 떠나서, 꾸준히 시도해서 아름다운 이야기

https://www.netflix.com/title/60000724

우연, 바람에 둥둥 떠다니는

운명, 바람에 등 떠밀려 가는

선택, 바람을 붙잡아 타는

 

마음을 간지럽히는 하얀 깃털과 함께하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기나긴 여정.

아름다워 보였던 그 끝에 멈춰 선 그의 표정이

아프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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