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gW1qZbCXgtg

 
변화가 두려운 것은 단순히 그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 안 따라줘서 잘못되면 어떡하지? 애초에 내가 목표에 도달할 능력이나 자격이 없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도 마냥 헛수고 아냐? 이것보다는 차라리 저게 더 낫지 않을까? 아직은 시작할 타이밍이 아니지 않을까? 일단 생각하는 시간을 조금만 더 가져 보자." 그런데 생애 가장 파격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요즘, 생각이 바뀌었다. 변화 결과의 불확실함을 머리로 떠올리기 이전에, 변화 과정의 고통을 피부로 먼저 느끼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 고통은 바로 외로움에서 비롯한다.
 
어떤 변화는 생각 이상으로 지지부진하다. 나름의 낭만을 꿈꾸고 급격한 전개를 점치며 시작한 것이라면, 현실로 마주하는 변화 과정은 정체 상태나 다름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아직 출발점이 가까이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은 '원래의 나'와 잘 맞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일 테니,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 반면 출발점으로부터 이미 멀리 와 버렸는데 아직 변화의 종착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어떨까? 우선, 걱정 어린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마치 자신이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도 여전히 그들과 비슷하고 어울리는 사람인데, 단지 조금 튀는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인 건데." 분명히 성장을 위한 습관을 지속하고 있고,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자신을 나날이 확인하지만, 기대했던 성과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즉, 외로움이 따르는 데 그걸 잊을 만큼의 보상은 없다. 상쇄되지 않는 고통을 참는다. 해야 할 일에 몰두하며 고통을 잊는다.
 
나는 선택했고 지속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긍정적인 변화, 즉 성장하는 길을. 원래부터 꿈꾸던 길이다. 다만 최근에 이르러서야 시작했을 뿐이다. "원래의 나는 이러니까, 계속 똑같이 행동할래."라고 둘러대는 내 모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것이 계기다. 분명히 어제의 나보다는 나아진 오늘의 나다. 단점을 고쳤고 장점을 살려가고 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이 시점의 상태는 정말이지, 죽도 밥도 아니다. 미숙함에서 오는 애매함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움을 한층 더 견디기 싫은 것으로 만든다. 정말이지 다 부질없어 보이고, 다 때려치고 싶다. 하지만 외로움을 핑계로 예전 상태로 돌아간다는 건 끔찍하기에, 그만둘 수 없다.
 
예전에 이 글을 쓰며 나비의 성장을 '아기 - 성장기 - 어른'의 3단계로 나눈 적이 있다. 과학적으로는 '애벌레(유충) - 번데기 - 나비(성충)'의 3단계로 나뉜다. 번데기 상태에서 나비가 겨울잠 비슷한 걸 자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때 가장 바쁘게 온몸을 변화시키더라. 애벌레였던 자신의 몸을 분해해서 액체 상태가 되고, 다시 우리가 아는 나비의 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겪고 있더라. 번데기를 열어서 그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비가 가진 미적 인상과는 다른 모습에 보기 숭할 것이다. 그 기간의 '애벌레도 나비도 아닌 상태'를 과거와 미래를 잇는 현재의 '과도기적 상태에서 가장 활발하게 성장하는 순간'이라고 이해하면, 그제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2050년의 세상에 발맞추어 가려고 한다면, 단순히 새로운 아이디어나 제품을 발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계속해서 자신을 재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교훈>

In order to keep up with the world of 2050, you will need not merely to invent new ideas and products but above all to reinvent yourself again and again.

- Yuval Noah Harari,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잠시 멈춰갈 땐 멈추더라도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재창조하기. 자신을 고정 프레임이 아닌 성장 프레임에 견주어 바라보는 것이 유효한 생존 전략 중 하나인 시대. 남들이 뭐라 해도 자기 자신만큼은 '번데기 속 점액질' 같은 자신을 "나답다"라고 바라봐 주는 것. 순간의 행복과 경이를 발견하기 위해 꼭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성장의 길을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여태 먹어 본 마라탕의 개수: 1
여태 달려 본 마라톤의 횟수: 2
 
# 첫 번째 마라톤, 제8회 거제시장배 섬꽃 전국 마라톤대회, 25년 10월 12일 일요일

 
 
# 두 번째 마라톤, 제27회 국제신문 부산마라톤대회, 25년 11월 16일 일요일

 
 
 
 
# 감상
두 마라톤 다 경치가 인상깊을 정도로 좋았다는 건 확실히 기억한다. 거제도 마라톤에서 코스를 따라 펼쳐진 산과 바다는 마치 여행 온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다대포 마라톤에서 낙동강하굿둑을 달릴 때 오른편의 낙동강 수면 위로 반짝이던 초대형 윤슬은 눈이 너무 부셔서 차마 오랫동안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마라톤에서는 나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그래서 완주만이 목표였다. 처음이니까 무리하지 말고, 끝까지 참자는 마인드로 임했다. 목표를 이루는 순간은 더없이 달콤하고 짜릿했으나, 그 이전까지의 시간이 참 고되었다. 12km쯤 달리고 나서 보급소에서 바나나 반 쪽을 먹을 때만 빼고. 바나나의 힘은 대단했고 어느 정도 활력이 돋아났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머릿속으로 피니시 라인을 그리기만 하며 달렸다. 거제도의 멋진 풍광조차도 상상속의 피니시 라인만큼 매력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좋아 보이는 문을 고르기 보다는, 내가 고른 문으로 들어가서 마주하는, 방 안에서의 시간을 좋게 만들자." 나는 마라톤의 입구로 들어왔음에 도취해 있는 채로, 얼른 출구로 나가기를 갈망하느라, 그 사이의 경험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즉, 내가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서 어깨가 올라갔고, "하프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이 되고자 눈이 돌아갔다. 그러고 있는 동안 하프 마라톤이라는 경험은 근육통과 인내만 따르는 노동으로 전락했다.
 
두 번째 마라톤에서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적어도 완주만큼은 보장된다. 그러니까 첫 마라톤처럼 끝만 보지 말고, 과정을 즐기자는 마인드로 임했다. 그걸 실천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천하려고 부던히 애썼다. 내 기억에 바나나를 주던 보급소가 두 번이나 나왔는데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바나나의 힘은 대단했고 역시 활력이 돋아났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어야만 한다고 닦달하며 달려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기만 하면 되는 유쾌한 경험인데 이것조차 즐기지 못한다면, 일상의 끝없는 권태와 과제가 찾아왔을 때 무엇을 무기로 맞설 수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나는 두 번째 마라톤을 완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서포터 분들의 '파이팅!'을 힘차게 복창하고, 하이파이브맨들이 보일 때마다 힘차게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분명 그 짧은 순간들은 즐거운 여운을 남겼지만, 달리기의 고통을 잊게 할 만큼은 아니었나 보다. 부족한 것이 훈련에 투자한 시간인지, 러닝화에 투자한 돈인지는 모르겠다. 뭐, 둘 다 보충 투자를 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순간으로 끝날 단 하나의 찰나를 위해, 구간으로 이어질 일련의 순간들을 감내와 희생 대상으로만 보는 관점. 지난날의 내가 무언가를 거하게 말아먹을 때를 보면, 꼭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 고장이 나 버렸지. 다시는 고장이 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무언가를 즐기려면 그것에 익숙해지는 정도를 넘어 서 능숙해져야 한다.
 
내년에 달릴 마라톤들에서는 내가 가장 잘 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빠르고 편하게 달리는 게 아니라, 가볍고 편안하게 달리는 쪽으로. 내년에 달리는 마라톤은 마라탕처럼 자극적인 맛에 소화가 잘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슴슴한 맛에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것이길 바란다. 그렇게 상쾌한 러닝 구간을 떠올리며, 꾸준히 러닝을 즐길 계획이다.
 

https://youtu.be/Mv_xtsgKEdw?t=44

 

 
 
 
"그래도 우리 아직 젊다"라는 말을 요즘 자주 한다.
학생 소리를 들으면 들뜨다가도
총각 소리를 들으면 씁쓸하기에,
'그래도'가 앞에 붙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일지도.
 
어린 시절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아직까지 젊고 싶어 하는 마음은 왜일까?
'그래도'를 안 붙이던 때엔 막상,
"난 아직 어리다."를 방패막 삼았으면서.
 
 
 
그때의 젊음은 저물어 가고 있다.
멍한 마음에 놓쳐버린 모든 것들,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며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붙잡기를 포기했던 기회들이 못내 아쉽다.
 
앞으로 떠오를 새로운 젊음에게
멍청비용을 다 물어줘야 하나?
저물어 가는 젊음이 저지른 방황에
타산지석이나 손해배상만 들먹이기는 너무 괴롭다.
 
 
 
작년에는 생각했다.
이 노래가 위로를 건네는구나,
중의적 의미로 미치지 못했던 청춘에게.
 
이번엔 생각해 본다.
이 노래가 찬사를 날리는거라고,
만성적 의문을 피하지 못했던 청춘에게.
 
 
 
아직도 나의 길을 모른다만,
새롭게 떠오르는 젊음이 어떤지는 안다.
질문에 사로잡혀 멍하니 있지 않는다는 것을.
몰아치는 질문에 휘청이지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길을 걸어오고 있고,
이제는 괴롭지 않으려 애쓰기까지 한다.
배회는 하겠지만, 방황을 하진 않는다.
그게 바로 저물어 가는 젊음이 남긴 유산일 거다.
 
 

메일함을 뒤적이다 마지막 페이지로 가 본다. 그때 먹던 급식의 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메일들 속에서 뜻밖의 발견을 한다.
 

 
고3 여름이었다. 7월에 사설 모의고사를 치르고 처음으로 반에서 1등을 했다. 2등급과 3등급 사이를 오가던 국어에서 갑자기 1등급이 나온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대뜸 '국어 성적 향상의 비법'을 반 친구들에게 공유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운 좋게 주사위가 6이 뜬 것에 무슨 비법이랄게 있는가 싶은 생각이었다. 어쩌다 얻어걸린 결과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주석을 다는 일이 참 어려웠다. 롤 얘기 하면서 장난치던 친구들, 모르는 거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하던 친구들 모두가 예상 독자라는 점 또한 곤란했다. 나름대로 가벼움과 진중함 사이에서 완급 조절을 하느라 애먹었다. 그러다보니 야자 끝나고 집 가자마자 쓰기 시작했는데도 어느덧 원래 자야 할 시각을 넘겼다. 그러다 보니 새벽감성에 젖어서 평소 공부에 관해 갖고 있던 철학을 글의 말미에 덧붙이기에 이른다.
 

 
공부를 하면서 맞닥뜨리는 고통의 순간마다 종종 찾아오는 의문이 있다. "내가 재능이 없는 건가?" "이게 내 적성과는 안 맞는 건가?" "아, 너무 늦게 시작했나?" 그러면 실존적 선택의 두 갈래 길이 눈 앞에 놓인다. 상황과 타협하며 이 고통을 회피할 것인가, 이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을 단련할 것인가. 나는 그 당시 친구들이 후자를 선택하길 바라며 위 글을 덧붙였던 것 같다. 공부 외에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즉 공부의 기회비용이 크지 않다면, 공부를 하는 게 최선이니까.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첫 직장을 갖고 어느새 1년이 조금 지났다. 1년 전까지는 취업이 머릿속 전부였는데, 지금은 생존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격동기라고 할 만큼 발전이 빠르고, 과도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전환이 일어나는 이 시기. 내가 더 잘, 더 오래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배움, 단련, 그리고 고통을 일상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는 듯하다. 여전히 세계에 종속되기 보다는 세계와 연결되고 싶으니까. 나를 버리고 세계에 끼워 맞춰지기 보다는, 세계와 함께 존재하고 싶으니까. 그럴 만한 능력과 자격을 갖춘 내가 되어야 한다. 점진적 과부하를 통해 성장하는 일을 삶의 시스템에 도입해야 한다.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수기를 남기거나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성취를 남기지는 못했다, 아직은. 온갖 종류의 산발적이거나 주기적인 고통, 그리고 만성적인 고독을 일단은 당연시하고 직면해 나가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왜냐면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까. 배움의 자세로 사는 삶에는 종종 즐거움을 만끽할 기회도 따라오는 것 같으니까. 지난 10년간 쓸 일이 없었던 수기글을, 앞으로의 10년만큼은 쓸 일이 있기를 바란다.
 
 
https://youtu.be/GaRVSWDcvnA?si=xGNJwumYVsbKRC79
 

 
기왕 살게 된 감사한 인생, 더 깊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도록, 자알 놀다 가 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52hfdX5y3Nc

 

지난 주말에 올림픽공원에서 서울파크뮤직페스티벌이 열렸다. 나는 가수 최유리의 '잠수'를 라이브로 들어보고 싶어서 토요일 공연만 볼 작정이었는데, 같이 가는 애는 볼빨간사춘기와 폴킴을 보고 싶다고, 일요일 공연까지 보자고 했다. 그래서 얼떨결에 주말 내내 음악 축제를 감상하게 되었다.

출처: 서울파크뮤직페스티벌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parkmusicfestival_/p/DLEn9mdSq6L/

 

내가 봤던 무대들

토요일, 비가 찔끔 내리다가 그친 후덥지근한 날씨

 

1. 최유리

- 힐링 그 자체

- '잠수'를 들을 때 느껴지는 시원청량함이 그때의 무더위와 꿉꿉함을 말끔히 씻어줬다

- 불러주신 모든 노래가 다 귀에 익은 것들이라 좋았다

 

2. 권진아

- 음원보다 더 시원한 라이브

- 초록 원피스를 입은 백예린의 Square 무대를 직관했던 사람들이 이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 그간 유튜브 알고리즘의 큐레이팅으로 몇 번 스쳐 들었던 노래들을 만나서 반가웠다

 

3. 장범준

- 김혜자st 메들리

- 20곡 해야 된다며 쉬지 않고 노래를 쏟아내셨다. 리허설 시간까지 공연 시간으로 활용할 정도였다. 덕분에 88잔디공원 전체가 노래방이 되었다

- 그만큼 많은 히트곡을 부른 가수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웠다

 

4. 루시

- 개성 넘치는 보컬 목소리와 그룹 컨셉

- 평소에 유일하게 들어봤던 '개화' 라이브가 좋았다

- 밤이라 마이크 음량이 확 줄어들었는데도, 열정적인 퍼포먼스와 침착한 무대매너가 인상적이었다

 

5. 넬

- 원래 록 스타일의 음악을 하시는 구나

- '기억을 걷는 시간'만 알고 있었는데, 우주의 천체를 소재로 한 음악을 천문학적인 크기의 볼륨으로 부르셔서 귀가 놀랐다

- 이 아티스트가 어떤 음악을 하는지 고막으로 팍팍 꽂혔다

 

일요일, 해가 쨍한 무더운 날씨

1. 릴보이

- 딕션 GOAT

- 처음으로 쇼미더머니와 비슷한 무대에서 관객이 되어 봤다

- '내일이 오면'은 물론 좋았고, 이름 모를 다른 노래들도 흥겨웠다

 

2. 홍이삭

- 얼굴도 잘 생겼는데 노래까지 편하게 잘하네...

- 몇몇 드라마의 OST로 접했던 노래들을 라이브로 듣는데 음원에서 듣던 것과 같아 놀랐다

- 발라드 가수가 하모니카 부는 건 봤어도, 휘파람 부는 건 또 처음 봐서 인상적이었다

 

 

3. 스텔라장

- 뜻밖의 발견

- 노래를 듣고 있자면, 외국의 어느 휴양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 푸른 하늘과 두둥실 뭉게구름, 그리고 초록이 무성한 나무. 이런 배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무대였다

- 할 줄 아는 외국어가 많으신 것만 알고 있었지, 불러주신 노래 중 절반은 귀에 익은 것들이라 신기했다

 

4. 정세운

- 크게 될 것 같은 밴드

- 한낮 무더위에 지쳐있는 관객들에게 화음 떼창을 요청하고 연습까지 시켜주는 적극성이 인상적이었다

 

 

5. 카더가든

- 수염 깊은 나무

- 이 분의 노래를 나름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절반은 처음 듣는 노래여서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유튜브에서 뵈던 장난기 많은 삼촌 이미지와는 다르게, 무대 위에서는 상당히 프로페셔널 하신 게 반전 매력이었다. 헤드셋을 끼느라 관객의 떼창을 아예 못 듣고 본인의 노래 소리만 듣는 게 끔찍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꿋꿋이 계속 쓰고 하시는 모습에서 장인 정신까지 느껴졌다

- 무대 뒤에서 내려오는 햇볕의 후광 때문일까, 그날 의상은 제일 어두침침했는데 가장 빛이 났던 사람이다

 

 

6. 폴킴

- 비긴어게인은 보정이 아니라 찐이구나

- 저음 라이브도 끄떡 없으시고, 탈인간급으로 안정적이게 노래를 부르셨다

- 말씀도 잘하시고 생각도 깊으시고, 21세기 음유시인 아닐까

 

7. 자우림

- 레전드 오브 레전드

- 어릴 적부터 귀에 익은 노래들에 절로 흥이 났다

 

 

https://youtu.be/-LH5p7q-JMc?si=U4TAklWpPXu1p1_t

 

 스물 아홉. '스물 다섯, 스물 하나'와 등차 수열을 이루는 해. 그 한 해의 절반마저 떠나보낸 지금.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땐 스물 하나였는데, 왜 벌써...? 지나간 청춘을 후회하기도 하고, 다가올 시간에 청춘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도 될까 고민하는 요즘이다. 지금보다 나잇값을 덜 해도 됐던 때가 과거이기에, 자알 놀지 못한 그때가 후회스럽다. 지금보다 나잇값을 더 해야 될 때가 미래이기에, 미리 준비하지 않고 자알 놀려고 하는 마음이 잘못된 욕심은 아닐지 혼란스럽다.

 그런 감정적 동요와 실존적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주말이었다. 낭비, 사치, 낭만, 그 무엇이라 부르던 간에 앞으로의 하루도 그런 시간들로 채우고 싶다. 나중에 생각이 바뀔런지는 몰라도, '지금'은 너무나 소중하다. 즐거움을 추구하고 싶다. 청춘이고 싶다. 일상에 무의미와 권태가 끼어들 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 억지 비전과 거짓 열정을 품을 생각을 하면, 속이 다 메스꺼울 정도니까. 실체가 있고 피부로 와 닿는 걸 쫓으며, 나아갈 힘을 얻고 싶다. 지난 주말의 음악 축제에서 내가 그러했듯이.

전설적인 사진 작가 숀 오코넬은, LIFE 잡지사의 마지막 호 표지 사진을 보내며 "거기에 삶의 정수가 들어있다"라고 말한다. 오프라인 LIFE 잡지를 폐간하고 온라인으로 전환하기 위해 파견된 구조조정 책임자는 정수(Quintessence)라는 단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부하 직원이 귀띔해주니까 겨우 본질(Essence)이라고 알아차린다. 하지만 두 단어는 미묘하게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챗지피티에게 물어봤다.

질문 | '본질'과 '정수'라는 두 단어의 뜻은 어떻게 달라?

답변 | 본질빵의 밀가루처럼, 무언가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요소를 말해. 반면 정수가장 훌륭하고 완벽하게 구워진 빵처럼, 무언가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상태를 말해.

 
어라라..? 내가 어림짐작하고 있던 것과 많이 다르네. 그렇다면 내가 요즘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질문들은, 삶의 본질과 정수, 둘 중 무엇에 관한 것일까? 챗지피티의 도움 없이 직접 해 보자.
 

  1. 나의 성장과 커리어, 잠재적 보수를 고려할 때, 지금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까, 이직을 준비해야 할까?
  2. 지금 여러 요인으로 노동시장의 초과 공급이 심각하고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경쟁력을 갖출까?
  3. 부모님께서 더 이상 경제활동을 못하게 되셨을 때에 가족을 무리없이 부양할 수 있으려면, 지금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요약하자면 '시장에서 인정 받고 돈도 많이 벌어서 가족을 든든하게 지탱하는 나'의 '존재 요건'이 무엇일까에 관한 고민이다. '레드오션 마켓에서 끗발 좀 날리는 슈퍼 알파메일'을 삶의 정수라고 간주하자니,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영화의 말미에 포착했던 삶의 정수가 지닌 구체성과 생생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밀가루가 풍족하게 쌓여있는 창고 키를 사막에서 찾아내자는, 본질을 향한 맹목적 구호에 가깝다. 절대 부족할 일 없이 빵을 많이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빵의 풍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무슨 킥을 넣을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는, 안정적인 생존에 한정된 고민이다. 본질을 갖춰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다 보니 요즘 내가 분에 넘치게 머리가 무거웠던 게 아닐까. 어느 길로도 두 발짝 이상 발걸음을 내딛지 못할 만큼.
 
그렇다고 삶의 정수를 찾아보자니 어렵다. 다만 이제는 좀 가벼워진 마음으로 질문에 직면해 볼 수 있겠다. 이 길이 삶의 본질을 채워줄 길이 될지 여부는 미리 알 수 없는 거니까. 본질을 들먹이며 무언가를 망설이거나 주저한다면, 그것은 핑계다. 어떤 선택을 내리더라도, 그 길에 충실한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 그거면 된다. 그 과정에서 마주할 구체적인 내 모습과 경험들 중 일부는 분명히, 삶의 정수가 될 것이다. 먼 훗날 내 주마등에도 삶의 정수가 담긴 사진 한 장 띄울 수 있길 바란다.
 

 
 
삶의 본질을 추구하며 분투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이미 삶의 정수라며 찬사를 건네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떠올리며.

 
자기소개를 하면 대개
나에 대한 정보로서 납득되기 쉬운
익숙한 라벨부터 꺼내 놓는다
이름, 나이, 거주지, 학교, 직업.
그러고도 모자란 분량을 채우며
공통 분모를 찾으려고 꺼내 놓는
취미 활동, 음악과 음식 같은 취향들.
 
그러고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재미없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이 들 때 이 시를 떠올릴 수 있다면.
 
나를 채우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소중한 것들이어서
꺼내놓는다는 게 왠지 조심스럽고,
그게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떠오르지 않는 거 아닐까?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말을 하는 그 순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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