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에서 하얗게 빛나는 작은 정사각형 조각은 경이(Wonder)를 의미한다. 처음 조각들을 배열할 때에는 경이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대신에 사각형 나무 틀(Frame)에 딱 맞아 떨어진다. 관점을 달리 하여, 경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면서 조각들을 배열하니 마찬가지로 사각형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사각형 나무 틀에 완전히 딱 맞아 떨어지진 않고, 약간의 이격이 있다.
삶(Life)을 생각하자면 때로는 어느 한 순간 혹은 바로 지금을, 때로는 그런 모든 순간들이 모인 전체 혹은 흐름을 바라보게 된다. 영상은 후자, 즉 거시적인 부분을 계획할 때 고려할 수 있는 두 가지 대안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교육, 일, 준거 집단 같은 일생의 구성 요소를 틀에 딱 맞게 배열하는 것. 두 번째는 틀에 딱 맞지 않더라도 경이로 채워놓을 공간을 마련하는 것.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따지기 보다는, 그저 무엇을 택하는 것이 나에게 어울리고 이로운 것인지 따져 보고자 한다.
여기서 틀은 여러 가지 삶의 제약 조건을 나타낸다. "살아가면서 언제까지, 무엇을,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가?" 제약 조건의 충족을 위해 사람은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되곤 한다. 하나만 어긋나더라도 전체적인 배열이 망가져 버리니까. 이같이 틀에 엄격히 자신을 맞추는 삶에서 내가 가장 많이 마주하는 감정은 불안감과 조바심이다. 행복이나 자기 만족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여기서 경이는 여러 가지 삶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틀을 구성하는 조각들 각각에서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 예정에 없던 조각을 갖게 되더라도 그에 맞춰 배열을 새로 바꿀 가능성.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꾸준히 지속하게 해 줄 동력을 얻을 가능성. 이같은 가능성은 몰입과 일탈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몰입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성과 내기'를 위한 뼈를 깎는 노력 같은 것이 아니다. 그 활동 자체에, 그 활동과 나 사이의 관계 속에서 '나'를 포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집중 속에서 메타 인지가 향상된다고 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일탈은 산책, 운동, 여행 등의 외피를 띠고 있는데, 결국 배회(Wander)하는 시간이다. "당면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 또는 영감을 얻기 위해 여행, 영화, 음악 등을 찾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시간, 비움의 시간이다. 나는 이런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휴식 없는 운동이 고된 것처럼, 여유 없이 몰아치는 일상은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어 시간에 '액자식 구성'이라는 개념을 배운 기억이 있다. 쉽게 말하면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고 했던가. 어찌 됐든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보기 좋은 액자에 담아서 공유하고 싶다. 그게 남은 삶을 잘 살아가야 할 중요한 이유 중 한 가지다. 그러다 보면 마치 액자를 이미 정해진 사이즈로 주문 제작해 놓고 취소나 환불이 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곤 한다. 조금의 이격 때문에 액자에 내 삶을 딱 맞출 수 없게 되어 가는 것 같을 때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제는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 그런 종류의 스트레스든, 정해진 틀에 딱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든.
대신 경이를 위한 공간을 꼭 마련하자. 이미 마련한 틀에서 다소 벗어나게 되더라도 말이다. 영상 속에서 경이를 나타내는 조각이 하얗게 빛나고 전체 그림의 중심에 있는 것에는 함의가 있다. 흰색을 흔히 '무색'이라고 말하지만, 흰색 빛은 모든 색의 빛을 포함하는 빛이다. 경이를 위한 공간을 캘린더에, 머리와 마음 속에 비워놓는다면, 앞으로 맞닥뜨릴 일련의 경험과 과제 속에서 중심을 잡고, 나만의 해석과 해법을 구성하고 실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어떤 조각이든 간에 말이다.
"무엇을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날까?" 마트에서 과자를 고를 때면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누군가로부터 듣고 난 이후부터인지, 어떤 밈을 접한 이후부터인지, 그 계기는 잘 모르겠지만 꽤 오랜 기간 동안 그랬다. 무얼 살지 고르는 순간의 선택 장애를 그런 말로 포장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즐겨 쓰던 그 표현에는 '선택의 순간에, 나는 무엇을 많이 고려하는가?'에 관한 단서가 담겨 있다. 바로 소문이다. 선택의 결과는 나 스스로 만족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내게 좋을 뿐만 아니라 남들 눈에도 좋아 보이는 선택이 어려운 경우, 나는 그 선택을 포기하거나 선택의 결과를 감추는 편이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스파이 X 패밀리"의 한 장면. 개인적으로 본 받아 마땅한 태도.
석달 전,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동안 잊고 지낸 과거 중 하나를 다시 떠올려 보게 됐다. 내가 중학생일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 어머니께 전화를 한 번 하시면서, 내가 한겨울인데도 겉옷 하나 걸치지 않고 등교하는 데 어떤 사정이 있는 거냐고 물어보셨다고 한다. 기억 났다. 그 시절에는 학교 나설 때마다 안 춥냐고, 패딩 사러 가자고 어머니께서 지겹도록 보채셨다. 하지만 나는 특유의 똥고집을 부리며 교복 자켓만 입고 등교했다. 그렇게 현관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가 잠을 확 깨워줬다. 도로로 나서면 칼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귀를 얼게 했다. 그런데 나는 그때 정말로 안 추웠다. 지금 견딜 만하니 이건 추위가 아니라 잠깐의 불편일 뿐이라 여겼다. 어차피 20분 안에 뜨끈한 교실에 도착하니까. 다만 외로웠다. 등교길에 겉옷을 걸치지 않은 사람이 나 말고도 있는지 살펴보곤 했는데, 그런 사람이 보이는 날은 드물었다. 무엇 하나도 밖에 걸쳐지지 않은 교복은 소속감의 상징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나만 벌거벗은 듯한 느낌을 줬다. 그럼에도 겉옷을 받쳐 입지 않은 것은 그게 그나마 차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노스페이스처럼 이름난 브랜드의 패딩을 입고 있었다. 충분히 따뜻하고 만듬새 있는 노브랜드 패딩을 입은 학생들도 가뭄에 콩 나듯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내 눈에 그들의 패딩은 왠지 초라해보였다. 내가 부모님께 "사달라!" 말할 수 있는 패딩 또한 그러했고, 만약 그걸 구매한다면 그건 무가치한 낭비였다. 어차피 그걸 입어도 외롭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계기는 분명히, 어느 선명한 기억에서 시작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의 꼬드김에 처음으로 다니게 된 종합 학원에서의 일이었다. 국어 수업이 끝나기 5분 전, 선생님께서는 가벼운 잡담을 시작하셨고 어쩌다가 운동화 브랜드 이야기가 나왔다. 하나 둘, 자기가 무슨 운동화를 신고 있는지 말을 했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는 내가 신경이 쓰이셨는지, 국어 선생님은 내 운동화는 뭐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다만 의자에 앉은 채 애꿎은 발만 뒤로 말아올릴 뿐이었다. 야속하게도 내 뒷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고, 거기 앉은 친구가 내 운동화 발꿈치 부분에 적힌 낯선 문자들을 더듬어 가며 대변해줬다. "그게 뭐지?" 하는 반응과 오가는 말들. 선생님께서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싸해진 분위기를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셨고, "나댄다"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던 개구쟁이는 그때 이후로 영영 숨어버리고 말았다.
그날부터 똑같은 대참사가 다시 일어날까 노심초사하며 지냈고, 그러다 보니 패딩 고르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운동화 대참사 당시 상황을 덜 참담하게 볼 여지는 있었다. "나는 브랜드에 별 관심이 없고, 쓸만하기만 하면 돼. 그렇게 부모님의 지출을 줄이고 용돈을 더 받아서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잖아." 하지만 그 얘기를 그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할 깜냥도 없었거니와, 생각이 거기에 이를 만큼 내 사고 방식은 깊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다. 다만 이런 후회를 하며 이불킥을 할 뿐이었다. "아, 내가 그때 좀 더 유쾌하게 직접 운동화가 뭔지 이야기했다면 분위기가 오히려 괜찮았을 텐데." 당시 우리 집은 내가 느끼기에 딱히 부족할 것 없는 경제적 형편이었지만, 사는 동네에 비해서는 뒤쳐지는 편이었다. 나는 뒤쳐진 신발이 친구들에게 주목받은 그날에, 왠지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어두운 생각으로 이어졌다. "내가 친구들보다 후달리는구나, 급이 떨어지는구나." 경제적 형편의 차이를 인격의 차이로 확대 해석해버린 나는, 최대한 머니 게임을 피하기 시작했다. 괜히 서로의 경제적 지위를 비교하게 되는 상황을 말이다.
그래도 신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시는 것일까? 머니 게임을 일찌감치 포기한 나는, 공부 게임에서 나름대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카카오톡은 상상 속의 세계로 두고, 유행하던 게임들은 쉬는 시간에 친구 폰으로 두어 번 맛만 보면서, 학교에서의 모든 시간을 공부에 쏟았다. 그 결과 우리 지역 어른들은 최고의 대학 중 하나로 평가해주는 국립대를 선택할 기회를 얻고 기세 좋게 합격했다. 부모님께서 정말 많이 기뻐해주셨다. 명절에 만난 친척들은 입을 모아 잘 했다고 말씀해주셨고, 부모님은 당신의 친구들에게서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여기저기 소문낼 만한 결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소문났을 때 부끄럽지 않은 결과구나. 지난 3년간의 절제를 두고 보람을 느낀 동시에, 안심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꽃이 하나둘 피어오르는 경험이 낯설었던 탓일까, 아무런 자정 작용 없이 머릿속은 온통 꽃밭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 현실적인 준비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이상만 높은 철부지로 3년을 보냈다. 대학 전부터 교수직을 바랐지만, 거기까지 가는 데 필요한 비용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접어두었다. 신의 직장으로 불리우는 한국은행에 가면 좋겠다 생각해서 오픈 카톡방에 들어가 눈팅을 하고, 정석으로 통하는 K대 교재를 해당 대학 근처 복사집에 연락해서 배송 받아 놓고선, 수학의정석 집합 단원만큼도 공부하지 않았다. 다른 금융 공기업 A매치든 B매치든, 가기만 하면 충분히 소문날 만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길 가기 위해 피땀 흘려 공부하는 동기들을 지켜보기만 하고 나는 뛰어들지 않았다. 가오는 살지만, 돈은 많이 받지만,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을 품은 채 최소 1~2년이나 준비할 각오까지는 없었다.
한 달쯤 전, 일과 행복의 융합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하고 준비한, 개발자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됐다. 지금 다니고 있는 첫 직장은 주관적으로 볼 때 내게 과분한 곳이다. 내가 실력 발휘를 할 수 있게끔, 내 능력의 200%가 아니라 110%만큼을 요구하는 과제를 줘서 차근차근 성장할 수 있게끔, 내가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끔 배려해주신다. 아직까지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직 지인들에게 취업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들 눈에 별로 좋지 않은 직장으로 보일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다. "대학 잘 갔다" 소리 듣던 때와 정반대로, "회사 잘 갔다" 소리는 좀처럼 나올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본 회사 이름, 낮은 연봉, 적은 직원 수는 일반적으로 좋은 회사상과 상반된다. 커리어 측면에서 원치 않았던 직무, 사수 없는 환경, 협업 없는 솔플은 신입에게 이상적인 회사상과 상반된다. 내가 아무리 주관적인 만족도를 어필해도, 이런 점들을 지워보기 위한 몸부림으로 치부될 것 같다. "개발자 되겠다고 졸업도 늦게 하고 싸핀지 뭔지 한다고 1년 더 쓰더니 겨우 저 돈 받는 거야?" 혹은 "싸피 1학기 때는 상 많이 받길래 좋은 데 가려나 했는데 취업은 잘 못 했네..."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하고, 그게 표정에서 드러나면, 견디기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일단은 정말 일부 사람들에게만 취업 소식을 공유했다. 비록 아무도 모르는 회사에서,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환경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기꺼이 그걸 들여다 봐주리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나는 행복한 채로 성장하는 길을, 지금처럼 계속 걸어갈 것이다. 아직 길의 끝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이 선택이 잘 한 것인지 아닌지 따지는 일은 성급한 낭비다. 삶의 도처에는 머니 게임, 공부 게임뿐만 아니라 건강 게임, 행복 게임, 소통 게임 등 다양한 게임이 있고 매번 다른 게임에서 다른 과정과 결과를 만나지 않던가.
대개 진학, 취업, 결혼, 자식 교육, 노후 준비 같은 것들은 통과 의례로 여겨진다. 그리고 '얼마나 잘 꾸며진 관문을 통과하는가'를 바탕으로 평가하는 것이 관례인 듯하다. 누가 봐도 예쁘고 멋진 관문을 통과하면 좋은 평가, 좋은 소문이 따라오는. 과연 그게 전부가 될 수 있을까? 관문을 지나는 건 정말 찰나의 순간일 뿐인데. 다른 모든 시간은 어떤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방문을 열고 나오기까지 만나는, 방 안에서의 순간들일 것이다. 그 순간들은 감히 예측할 수도 없고, 그러므로 앞서 평가할 수도 없다. '좋은 문'이 무언가 좋은 걸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곳이 '좋은 방'일 가능성을 높여주기만 한다. 그 문이 닫혔다고 해서 좋은 미래가 가로막히는 것은 분명 아닐 테다. 앞으로 나는 '좋은 시간을 얻기 위해 누구나 좋다고 말하는 문을 선택하는 것'에 골몰하기 보다는 '어떤 문을 선택하든 간에 좋은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소문이 나겠지. 삶의 방식과 태도를 잘 골랐다고. 좋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좋은 삶을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아래 글은 5년 전, 대학교 2학년이던 내가 글쓰기 교양 수업 때 작성한 글이다. 이 글을 5년 전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보낸 메시지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근거 하나 없는 이 메시지에 증거를 직접 더해주자.
며칠 전 수능이 치러졌고,매년 그랬듯 그날에는 한파가 찾아왔다.수험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적자생존의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나름의 열정을 불태우며 달려왔을 터다.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겨울일 뿐이다.한때 출제자가 의도한 ‘정답 맞히기’ 전문가였던 청년들은,이제 기업이 요구하는 ‘정답 되기’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비평문 「자소서는 어떻게 ‘자소설’이 되는가」(문강형준)가 지적했듯,기업의 인재상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대학생활을 보내는 것이다.기업은 ‘인간상’ 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요구한다.취업 잘 했다 소리 들으려고 몇 년을 공들여 필기와 면접,발표,토론 등 다양한 시험을 준비한다.빈칸 한 줄 채워보자고 스펙을 만들고,단칸방에서 지내며 김밥 한 줄로 배를 채운다.대체 왜 청년들은 또 다른 수험생활을 계속하는가?
대한민국 청년들 앞에는 표준화된 경로가 존재한다.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사회적 잣대로 점철된 보편적인 길 말이다.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부모를 만나 좋은 대학,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자식 교육,노후 설계까지 완벽하다면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라고 평가받는다.가정사적 배경을 제외한 모든 게 생애별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여겨진다.적절한 시기에 우수한 성적으로 각각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매 시기의 목표다.이러한 경로는 경제개발을 위해 지어진 경부고속도로처럼 사회의 효율성을 끌어올린다.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에서 간편하고 신속하게 인재선발을 하기 위해 수능과 공채 절차가 만들어졌다.또한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쉽고 빠르게 판단하려고 다양한 외적인 기준들이 통용되었다.그리고 청년들은 보기 좋게 고속도로로 몰려,막차 난간을 붙잡고 끌려가고서라도 종착지인 서울에 제때 도착하고자 한다.
사회가 닦아놓은 단 하나의 길로 청년들이 쏠리는 것은 서울에 가는 것,경부고속도로를 타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상을 주입받기 때문이다.연필 쥐기도 불편한 어린 시절부터 ‘거지꼴 당하기 싫으면 공부해라’는 잔소리를 듣는다.그 이후로 해는 바뀌는데 명절마다 듣게 되는 ‘출세’에 관한 덕담과 충고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대학 입시’라는 수요를 만족시키고자 학교는 모든 가용한 자원을 획일화된 커리큘럼에 쏟아붓고 학생들의 참여를 강제한다.싫은 소리 한 번 내봐도 돌아오는 말은 대개 뻔하다.“대학에 못 가면 낙오자가 되는 거다.근데 일단 대학에만 가면 다 할 수 있다.” 이런 외압을 못 이겨 공부만 하던 청소년들은 어느새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유일하게 안전하고 빠른 길이라고 믿게 된다.그런 믿음이 가치관으로,수험생활이 삶의 방식으로 고착되면서 청소년은 청년으로 성장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청년들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바로 주체적인 선택이다.그들의 각 생애에 위치한 목적의식은 집단의 합리와 논리로 설정된 사회의 목표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N포 세대’라는 말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건 그것이 기회비용이 아니라 일종의 박탈이기 때문이다.청년이 주관을 따라 선택을 하고,그것을 이행하면서 다른 가치들을 포기했다면 그만치 힘이 빠지지는 않았을 테다.청년은 무기력에서 벗어나 사회 속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무한경쟁사회는 사람들이 경합적인 길로 몰려서 나타난 현상이며,자신이 하필 정체가 심한 고속도로로 내몰린 건 사회적 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스스로 내린 선택의 부재 때문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회가 설정한 통과의례를 마주할 때마다,자신을 억제하면 ‘성공’이라는 틀 안에 들어갈 수 있다.그렇게 뒤처지지 않고 도착한 서울에서 ‘착실한 일꾼’이라는 훈장을 받으면 꽤 보람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어렸을 적 꿈이 ‘SCV’인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표준은 정답과는 다른 말이다.그리고 외적인 요인이 자신의 삶을 결정지었다는 말은 너무 효율적인 단정이다.
날마다 덕에 관해서, 그리고 다른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그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좋음이며,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 -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떠나가는 하루 일상 속 내가 살아낸 순간들을 붙잡는 일, 대개는 그것만으로 하루가 만족스러워지는 듯하다. 성찰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까지 말하는 소크라테스의 워딩은 아주 쎄 보인다. 사실 저 말은 "감옥에서 도망갈 수도 있는데 왜 도망가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한 이야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감옥에서 도망치고 숨어지내며 얻어낸 하루에 관한 이야기에는 덕이 없고, 이전에 자신이 누렸던 좋음 역시 없다는 것이다. 오늘 대표님과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분은 어떤 이야기가 나를 혹하게 할 지 아주 잘 알고 계신 분이었다. 그 적절하디 적절한 권유를 나는 승낙했고, 오늘 자고 일어나면 이제 출근 있는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시 오늘 하루, 그때 그 순간을 돌아본다. 오늘 나는 백수 딱지 붙은 하루로부터 도망친 것이기도 하고, 책임과 돈이 오가는 사회의 부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최종 선택을 내린 주체는 나였지만, 내가 갈 길의 결정자는 내가 맞았을까? 이미 나들목으로 빠졌으니, 이게 최선의 선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성찰하고 실천하는 수밖에.
깊이 있는 사고를 앞세워 삶을 이끌 때, 우리는 남의 삶의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살게 되므로, 성찰되지 않는 삶은 충분하지 않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16p)
데카르트의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생각하는 나'이다. 전지전능한 악마에게 속고 있다고 의심해도, 의심하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하고 '생각하는 나'는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15p)
"모든 것을 의심하라" 말했던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페이지를 읽기 전에는 생각이란 게 존재의 조건이라서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했다. 이 페이지를 읽고 난 후에는 생각, 의심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된다. 빨간 알약이란 것이 없었을 시절부터 그는 인간이 매트릭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했던 게 아닐까. 올들어 부쩍 많이 하는 생각인데 운동은 생각과 의심보다 더 중요한 듯하다. 건강에도 좋지만, 강도가 적당히 높은 운동에 정말 몰입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고양감은 매트릭스 세계에서도 구현 난이도가 최상이었을 듯하다. 몸을 쓰는 것에서 오는 자극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 체계가 아주 오래 전부터 발달해왔기 때문에 아주 원초적이면서 강도가 세다는 이야기를 어느 유튜브에서 본 것 같다. 쫓는 것이든 쫓기는 것이든 짐승과 함께 러닝하던 그 시절부터 말이다. 쫓지도 쫓기지도 않는 채로 탁 트인 능선을 오르고, 한적한 트레일을 따라 달리고, 잘 포장된 도로 위에서 페달을 밟다 보면, 이런 순간들 또한 존재의 이유로 매우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데카르트는 그런 순간들을 좋아했을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순간들이면 모든 의심이 말끔하게 사라진다.
상대방을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기에 딜레마는 일상생활이나 철학 논증에서 즐겨 사용되는 논박 방법이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딜레마를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반박한다.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은 신이 그것을 막지 못하거나 막을 뜻이 없다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된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신의 존재가 의심스러워진다. 신이 악을 막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이 무능하다는 뜻이고,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없다면 그것은 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은 모름지기 전지전능하고 지극히 선하다고 인식되므로, 무능하고 선하지 않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14p)
상상해 보자. 나는 신은 전지전능하고 지극히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 책은 위와 같이 신이 없음을 주장한다.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다. 그냥 신의 전지전능함과 선함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으로 타협해야 할까?
우선 세상에는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악이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을 것이기도 하다. 아래의 진리표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참이기에 '신이 악을 막지 못하거나 막을 뜻이 없다'는 명제도 참이 된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게끔 하려고 하는 신의 의도도 있고 그것을 실천할 능력도 있다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악을 막을 수 있고 막을 뜻이 있다
거짓
참
신이 악을 막지 못하거나 막을 뜻이 없다
참
참
그럼 이제 아래 진리표가 보여주듯이, 상대방의 논증에 따른다면 신이 전지전능한 동시에 선하다는 진술은 거짓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상대방의 논증에 따른다면 말이다.
신이 악을 막을 수 있다 (= 신이 전지전능하다)
신이 악을 막지 못한다 (= 신이 무능하다)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있다 (= 신이 선하다)
거짓
참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없다 (= 신이 선하지 않다)
참
참
아래 두 개의 진리표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상대방의 논증을 그대로 수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신이 악을 막지 못한다면 신은 무능하다'는 명제는 참인가? 여기서 무능함이 '전지전능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전지전능함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참이다.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신이 (모든) 악을 막을 수 있다
신이 (모든) 악을 막지 못한다
신이 전지전능하다
참
거짓
신이 무능하다
거짓
참
그렇다면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없다면 신이 선하지 않다'는 명제는 참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는 '도덕'이란 것이 절대적인지, 아니면 상대적인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선인 것은 모두에게 선이고, 그 역 또한 성립한다면, 악을 자행하려는 누군가를 막는 것이 선이라고 강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A라는 사람에게 선인 것이 B라는 사람에게는 선이 아닐 수 있다면 어떨까? A의 입장에서 악인 것을 막으려는 행동이 B의 입장에서는 선인 것을 막는 행동이 된다. 그런 행동을 우리는 폭력이라 부르기로 했고 과정을 보나, B가 얻게 되는 결과를 보나 악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상대적인 선과 악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부정청탁죄로 기소된 고위 공직자 A씨는 자신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B씨에게 변호를 의뢰했다. B씨는 최대한 많은 사실을 공유해달라고 했고 A씨는 자신이 부정청탁뿐만 아니라 횡령을 저지른 사실 또한 고백한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B씨에게 선한 행동은 무엇일까? '변호사윤리장전'에서는 직무상 알게 된 의뢰인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부당하게 이용하면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B씨에게는 A씨의 횡령죄를 묵인하는 것이 선이다. 그 덕분에 부정청탁죄로만 형을 집행받게 된 A씨는 자신의 또다른 친구이자 기자인 R씨에게 자신의 횡령죄를 고백했다. A씨와 R씨는 서로 비밀 없이 지내는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R씨는 A씨의 비밀을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라는 기자로서의 사명감이 있다. 친구로서의 선과 기자로서의 선이 충돌하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공공복리가 위협 받았다는 또다른 진실을 은폐해야 하는가, 공개해야 하는가? 이처럼 선과 악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한 사람 안에서도 사회적 역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R씨는 자신이 중시하는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 선을 택할 것이다.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있다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없다
신이 선하다
???
???
신이 선하지 않다
???
???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선악은 상대적 개념이다. '신이 앞을 막을 뜻이 있다/없다'라는 사실로부터 '신이 선하다/선하지 않다'라는 가치 판단을 이끌어 내는 근거는 사람마다 다르다. 가장 중요한 논쟁의 여지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신의 능력'과 '신의 의도' 중에서 뭘 선택해도 패배로 이어지는, 난감한 상황에 나를 빠뜨렸다. "와, 두 가지밖에 없는데 둘 다 나한테 불리하다고? 너무 억울한데. 그래도 둘 중에 차악은 뭐지?" 고민에 빠져 있다 보니, 핵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것이다. 요컨대 상대가 제시한 딜레마는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있다'라는 명제와 '신이 선하다'라는 명제가 서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그 자신의 논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딜레마를 풀려고 하면 답이 없는데, 딜레마가 아니라 애초에 오류투성이였던 것이다.
책에 제시된 논증은 [논증 2]이다. 만약 [논증 1]이 책에 제시되었다면 딜레마에 시달리기 이전에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없다면 그것은 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다'는 주장에 담긴 오류를 발견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논증 1] 1. 신이 악을 막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이 무능하다는 뜻이다. 2. 그리고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없다면 그것은 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다. 3.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면 신이 그것을 막지 못하거나 막을 뜻이 없다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된다. 4. 그런데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신의 존재가 의심스러워진다. 5. 신은 모름지기 전지전능하고 지극히 선하다고 인식되므로, 무능하고 선하지 않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논증 2] 1.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면 신이 그것을 막지 못하거나 막을 뜻이 없다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된다. 2. 그런데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신의 존재가 의심스러워진다. 3. 신이 악을 막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이 무능하다는 뜻이다. 4. 그리고 신이 악을 막을 뜻이 없다면 그것은 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다. 5. 신은 모름지기 전지전능하고 지극히 선하다고 인식되므로, 무능하고 선하지 않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출처: https://url.kr/qP9GiR
딜레마, 참 골치아프다. 골치아픈 문제는 피할 수 있으면 넓은 안목을 갖고 피해가는 게 좋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정의와 사랑 사이의 딜레마를 제시했다. 둘 다 놓치기 싫고, 조커에게 놀아나는 것도 싫었던 배트맨은 그의 머리통을 부숴 딜레마를 없애고 싶었겠지만, 그럴 수 없도록 조커가 아주 치밀하게 설계를 해 놓은 터였다. 내가 일상에서 딜레마를 만나게 되면, 그게 조커가 만든듯이 오류가 없는지 자문부터 해야겠다. 정말 난해해 보였지만 잘 살펴 보니 거짓 딜레마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고 지극히 선한 신께서 다만 악은 막지 않으시더라도, 딜레마만큼은 최대한 막아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언제나 문제에서 정답을 찾는 일보다 오류를 찾는 일이 더 어려우니까.
제목의 화는 재앙을 가리키는 '길흉화복'의 화(禍)가 아니라, 머릿속을 뜨겁게 달구는 버럭이가 담당하는 화(火)다. '피하다'라는 표현을 보면 으레 전자를 떠올릴 듯해서, 오히려 본문에 나온 '다스리다'라는 표현이 제목으로 더 적절하다고 본다. 화가 나는 순간에 그것을 다스리는 일은, 화를 다스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절반 이상 성공하는 듯하다. 결국 그 생각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의 문제다. 치밀어오르는 화가 너무 거대해서 그것을 통제할 필요에 대한 생각이 자리를 잃게 되면, 입에서 불을 내뿜기 시작한다. 정중한 말과 차분한 어조로는 말이 도저히 전달되지 않는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닌 한, 화를 내길 잘했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내뿜은 불은 분위기를 순식간에 과열시켰다가 다시 순식간에, 그리고 더 오랫동안 냉각시킨다.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화를 냈던 자신에 대한 후회와 반성을 하게 된다.
운전대를 잡은 버럭이 (출처: https://url.kr/BfOKqo)
그런데 결과적으로 화(禍)를 불러일으키는 선택을 과거에 저지른 어리석었던 자신을 향해 화(火)를 내는 것은, 어째 좀처럼 자기 반성적 태도로 이어지지 않는 듯하다. 지난 선택을 후회하면서 기분이 가라앉는 것보다는, 그 선택을 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활력이 샘솟는 것이 더 낫다는 무의식적 사고의 결과일까? 아니면 '꾸짖을 갈(喝)'만이 자신에게 파급력을 행사하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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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살면서 처음으로 입사 제안을 받았다. 체육관에서 같이 스파링하던 형님께서 갑자기 내 직업이 뭐냐고 물으셨고, 나는 개발자로 취업 준비중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내 전공, 학교를 물으시더니 자바로 개발을 할 줄 아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렇다고 했고, 그분은 일단 6개월 정도 알바하는거라고 생각하면서 같이 일해보자고 하셨다. 알고 보니 그분은 스타트업 대표셨고, 내가 입사한다면 주 업무는 사업계획서 작성 및 각종 문서 관리 같은 사무 업무인데, 프로토타입 개발 또한 맡아서 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두 가지 업무를 맡을 가능성 때문인지, 생각보다 처우도 괜찮았다. 그런데 고민이 된다. 개발자로 취업할 준비에 전념하는 것의 가치와 기회 비용, 백수 딱지는 뗄 수 있지만 경력으로는 쓸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의 가치와 기회 비용 사이에서. 목적지까지 제 시간 안에 가야 하는데, 고속도로 끝 차선에서 탐탁지 않은 서행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들목이 나오고, 직진할지 옆으로 빠질지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면 지금과 같은 심정일까? 나는 화(禍)를 피하고 싶다. 훗날의 내가 오늘날의 나에게 화(火)를 내는 일 또한 피하고 싶다.
실체라는 말을 처음 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만이 진정한 실체라고 말했다. 이 사람 한 명, 저 개 한 마리가 그에게 실체이다. 실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ousia는 '존재' 또는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중세의 보에티우스가 이것을 '사물의 근저에 있는 어떤 것'이라는 뜻의 라틴어 substantia로 번역하면서 사물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견줘 보에티우스가 번역한 실체는 그런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어떤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12p)
이 페이지를 읽고 '실체'의 뜻이 괜히 헷갈리기 시작했다. 고대, 중세, 근대의 여러 철학자들이 정의한 '실체'가 쏟아지면서 평소에 '사건의 실체'와 같이 익숙하게 사용하던 단어가 왠지 낯설어졌다. '사건의 실체'는 '사건의 진실'과 서로 다른 뜻일까, 같은 뜻일까? 각각의 반대말을 찾아보자. 실체와 허울, 진실과 거짓? 이제야 두 사람의 '궁극'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감이 오는 듯하다. 밤하늘에 어떤 푸른 별이 떠 있고 그 별의 겉보기 등급이 절대 등급보다 높다고 해보자. 그럼 우리 눈에 비친 저 별은 본래의 밝기 이상으로 밝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찬란하다고 느낀 저 별의 모습이 거짓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 정도의 허울이 섞여 있는 모습인 것이다.
이 페이지의 뒷부분에서는 '실체'의 정의에 관한 이성론자와 경험론자의 대립이 나온다. 이 지점에서 '실체'의 실체는 더욱 모호해진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만화 <원피스>에서 '닥터 히루루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만둬라. 니들 공격 정도론 난 죽지 않아.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 ...아니.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 스프를 마셨을 때? 아니야.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내가 사라져도 내 꿈은 이루어진다. (...) 이어받는 자가... 있다면..." 비록 그가 사람들에게 돌팔이로 불리긴 했지만,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에게 생물학적 죽음은 허울일 뿐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곧 자신의 실체였고, 그것을 누군가 계승해 주기만 한다면, 자신은 살아 있는 것과 다름 없었던 것이다. 만약 철학사에 인용된다면, 닥터 히루루크는 이성론 파트에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나는 이 진술이 인간의 실체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본다. '사람들과 관계 맺음, 그리고 살아 있음.' 수많은 사람들 저마다의 궁극적인 목표의 궁극적인 교집합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동안 갖은 종류의 허울 앞에서 만족과 불만족, 갈망과 포기를 경험했다. 그런 경험 속에서 나아가거나, 멈춰서거나, 쓰러지는 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번 새로운 상황, 사람, 그리고 나를 만나며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가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드럼 소리를 듣고, 허울에 가리워진 실체를 포착할 수 있다면, 그 실체를 기꺼이 추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떤 세상이 기다릴지 그 실체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 보고 싶다.
닥터 히루루크가 이루고자 했던, 겨울섬에 피어오른 벚꽃 (출처: https://url.kr/DwuH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