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게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 윌리엄 G. 셰드

 
오랜만에 찾은 캠퍼스에는 곳곳에 봄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날을 거듭할수록 집을 나설 때나 집으로 들어갈 때 하늘이 점차 밝아지는 것을 보며, 봄이 곧 오겠거니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봄이 왔음을 우연찮게 보게 되니 왠지 낯설었다.

 

졸업장을 받고 졸업복을 입고 학사모를 썼다.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막 들어왔을 때에는 처음 만난 동기들과 함께 과잠을 입고 다녔다. 7년이 지난 오늘은 졸업의 표식을 둘러쓰고 축하를 나눴다. 그러는 와중에도 졸업은 왠지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 맞다면, 유예가 가능한 졸업은 대학교 졸업이 유일하다. 이전까지의 졸업들이 한 울타리에서 다른 울타리로 넘어간다는 의미였다면, 이번 졸업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번 울타리의 너머에는 다른 울타리가 없다. 나는 울타리가 없는 상황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졸업 유예를 생각하게 됐다. 준비가 안 된 채로 밖으로 나서기는 언제나 두려우니까.
 
사실은 졸업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 맞다. 오랜만에 찾은 캠퍼스의 가파른 언덕보다 더욱 거칠 듯한, 캠퍼스 너머의 파도가 막막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준비가 안 되었다는 핑계를 대며 울타리 밖으로 나서는 일을 미루려 했다. 그러나 준비된 인재를 양성하는 모 교육 프로그램은 졸업을 요구했고, 급하게 요건을 맞춰서 졸업하게 되었다. 역시나 준비는 누군가 시켜주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해야 하는 것임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그리고 준비가 안 된 채로 상황을 맞닥뜨려 본다면, 다음에는 비슷한 상황을 위한 준비를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것도.
 
기록을 하면 기억하지 않아도 돼서 안심이 된다. 시원섭섭함, 먹먹함, 아쉬움. 그밖에 뭐라 표현할 지 몰라서 그냥 '만감이 교차한다'고 둘러댔던 모든 감정들. 전부 빼고 오늘의 즐거움과 고마움만 기억으로 남았으면.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울타리 너머의 여정 중에도 곳곳에 봄꽃이 피어오르면 좋겠다.
 
예상보다 더 따뜻하고 화창해서 좋았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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