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줄 감상
흑백 사회 속에서 빛나는 삶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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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반세기 넘도록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읽히고 사랑받는 하퍼 리의 수작!성경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꼽히는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를 예스러운 표현을 오늘날에 맞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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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깊은 말
(배경) 1930년 미국 남부 메이콤 군의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재판장으로부터 한 흑인의 관선 변호사로 지명받는다. 이 흑인은 백인 여성을 강간한 혐의를 받아 사형이 구형되었고, 핀치 씨는 이 피고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즉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재판에서 밝혀내야 했다. 메이콤 군의 백인 사회, 특히 읍내의 이웃 주민들은 '혐의가 있는 흑인은 벌을 받아 마땅한데, 이를 싸고 도는 백인 변호사가 있다?'에 회의적이다 못해 거부 반응을 보인다. 핀치 씨의 두 자녀들은 학교 친구들이나 이웃 어른들께 "너네 아빠는 깜둥이 애인"이라는 모욕을 상습적으로 들으며 덩달아 비난받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치 씨는 자녀들에게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진심을 그대로 전한다. 딸이 아빠에게 왜 그렇게 미련한 선택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자식들에게 떳떳한 아버지이고 싶은 마음을 전하며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 원칙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야.
# 한 글 감상
핀치 씨는 자녀들에게 엽총을 선물해 주며 '앵무새'는 쏘지 말라고 한다. 앵무새는 듣기 좋은 소리를 낼 뿐, 농작물이나 사람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핀치 씨는 한 명의 하얀색 앵무새와 한 명의 검은색 앵무새를 지키는 일을 숭고하게 여기며 실천한다. 그는 내면의 목소리를 직시하고 관철하며, 집단의 압력을 무릅쓰고 '앵무새를 죽이는 사회'를 바꿔 나가는 데 힘 쓰고, 자식들 또한 그 뜻을 이해하고 계승하기를 바라며 길을 열어주고, 최소한 '앵무새를 죽이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열어준다.
그가 살던 사회는 '우리'와 다른 피부색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저들'이라 부르며 배척하는 곳이었다. 이게 공정하지 못한 '차별'이라는 점을 오늘날의 우리는 잘 안다. 그런 차별이 1930년대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였다면, 오늘날의 숙제는 다르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행해지는 '차단'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라는 말씀을 엄중히 따르는 듯 보이지만, 그 다양한 것들이 각각 지닌 특수성에는 그다지 주목하려 하지 않는 듯하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는 게 맞지'라고 설교하듯 일단락 짓고, 어떻게 다르고 왜 다른지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부정하는 모습은, 다양한 인간과 삶의 방식이 이루는 세계가 분열되는 과정일 뿐이다. 그런 분열은 그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며, 색다름을 체험하는 즐거움을 경험할 기회를 없애는 일이다.
'흑인도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며, 법정에서만큼은 그것이 존중받아야 하며, 그게 옳다고 믿는 내가 직접 실현해야 한다.' 법조인으로서의 직업적 사명감, 자기 영역에서라도 실현되어야 마땅한 정의, 스스로 정의내린 올바른 삶의 방식. 핀치 씨가 양심에 기대며 찾은 결론이다. 이는 그가 속한 백인 사회가 가진 관습이나 정서에 대치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내면의 목소리를 떳떳하게 관철해 낸다. 그의 그런 면모는 가히 영웅적이다. 작가의 의도는 마냥 영웅적 행동을 하며 위험을 자처하라는 뜻은 아닐 테다. 단지 그의 아들 젬과 딸 스카웃이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을, 이 책의 독자가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일 테다. 앵무새를 살려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울음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면 뜻밖의 선물이 찾아온다는 점을 말이다.
백인과 흑인의 분열을 정당화하는 형이상학적 근거는 서로 본질(Essence)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본질, 혹은 삶의 본질을 찾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빅 퀘스천이며, 작품 속 1930년대의 백인들 중에는 '다름'을 '틀림'으로 치부하며, 자신이 가진 특수성을 '옳음'이라 단정짓는 자기기만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본질을 따지고 선을 긋는 행위가 그렇게 가치로운 일일까? 서로 다른 배경과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인격과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삶의 정수(Quint-essence)와 같다. 각자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며,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삶이 찬란한 보물과도 같다. 이분법적 논리로 칠해진 색안경으로는, 무지개를 이루는 다양한 빛의 원소들을 결코 포착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편리한 사고 방식과 익숙한 삶의 방식만을 고수하며, 보물 발견의 기회를 편견 하나로 차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창문을 닫고 스스로 어두워지는 길일 테다. 내가 만나는 사람의 수만큼,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의 멋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를 뚫고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가 즐거웠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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