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제목

Love Replica. 직역하면 '복제된 사랑', '모조품 같은 사랑', '짝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이 책이 풀어놓는 여덟 가지 이야기들 각각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랑의 단면들은, '이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다' 싶은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가짜 사랑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 모더니즘 vs 포스트 모더니즘

이 책을 같이 읽은 형님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말했다. 모더니즘이 규율과 질서, 일원화와 관련된 담론이라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무질서, 다원화와 관련된 메타 담론이라고 덧붙였다. 모더니즘에서 비유를 통해 원관념을 강화하고 그 본래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원관념에 적용해 오던 기존의 인식과 해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유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 드라마 vs 이 책

드라마가 모더니즘이라면, 이 책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드라마를 하나의 문학적·비유적 세계라고 본다면, 거의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에서 원관념은 '사랑'이다. 드라마의 극본과 연출이 일종의 보조 관념이 되며, 원관념이 시련과 역경 속에서 부각되고, 문제 상황이 극복되고 난 뒤에 더욱 강화된 모습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진정한 사랑 또는 완전한 사랑을 작가와 감독마다 다른 인물, 사건, 배경, 배우를 통해 묘사한다. 사랑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 있고, 드라마는 대개 그 인식에 기반하므로, 시청자들은 어렵지 않게 이 드라마의 원관념, 사랑을 포착할 수 있다.

이 책 속 여덟 가지 이야기들은 무엇을 원관념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부터 모호했다. 제목에 'Love'가 들어가 있지 않았더라면, 각각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한 가지 맥락을 절대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원관념을 '사랑'이라고 하자. 그런데 사랑의 단면을 읽어낼 수 있는 행동들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인간의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고 배려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인공지능 로봇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진정한 의미의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기서 애틋함을 느끼는 것에 왠지 위화감이 드는데?' 같은 의문이다. 확실히 드라마 속 사랑보다는 특이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사랑의 모습인가'라는 기준을 들이대기 이전에 '이게 정말로 사랑인가 아닌가'라는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 다시 이 책의 제목으로

이 책에서 넌지시 보여주는 사랑의 단면들은 '사랑이라면 으레 이래야 한다'는 익숙한 기대와는 동떨어진, 낯선 외양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상기시키는 감정은 사랑할 때 느끼는 그것과 닮아 있다. '진짜 사랑인지, 가짜 사랑인지'를 구분하려고 하면 모순이 생겨나는 이 책. 과연 작가는 닫힌 결론을 제시하는 걸까? 오히려 열린 질문을 던져주는 듯하다. 이 책의 이야기 속 요소들에 '진품명품'을 각자 해 보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사랑에 관한 인식의 틀'을 확인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본다. 제목을 문장형으로 표현하면 이렇지 않을까. Is This Love A Replica? 짝퉁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익숙한, 그렇다고 진짜라고 하기엔 어딘가 낯선, 그런 사랑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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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이 책은 사랑을 넘어서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인식도 돌아보게끔 한다. 모더니즘이 진퉁과 짝퉁을 구분한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런 구분으로부터 벗어난다. 모더니즘이 범주를 나누는 경계선을 긋는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이 책 속의 사랑은 내가 볼 때 진퉁일까? 짝퉁일까?' 하는 양자택일의 과정에서 부조리를 마주하고 나면, 특정한 기준을 설정하고 적부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익숙한 잣대로만 세상을 바라보기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는 개방적인 태도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대상을 두고 기존의 틀에 끼워맞춰 보는 폐쇄적인 인식 역시 필요하다.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의 세계를 일단 수용하고, 그곳을 나름대로 해석해볼 뿐, 이미 만들어진 작품 속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현실 세계에 무언가를 관철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려면 내 눈 앞의 세계가 머릿 속의 세계와 일치하는지, 불일치한다면 어떤 범주에서 두 세계가 구분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고 설득시키기 위해서도 분명한 개념 정의와 구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포스트 모더니즘보다는 모더니즘에 가까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서로 다른 두 대상을 나름의 기준으로 구분하고 비교해보는 편이다. '비트코인이 화폐라는 말은 누군가의 당위이지, 아직 실재가 아니다.' 하는 결론과 '컴퓨터는 내게 수단일까 목적일까' 하는 물음이 그 예다. 그렇게 세상을 인식하면 윤곽이 잡힌 지식 체계를 쌓는 데 도움이 되는 듯하다. 하지만 때때로 마주하는 모순에 대해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걸 그냥 받아들이자니 너무 거슬리고, 바꿔보자니 당장은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변화시킬 수 없는 모순도 있다. 그걸 맞닥뜨릴 때마다 익숙해질 때까지 마냥 참아야 하는 걸까?

포스트 모더니즘은 범주화된 인식이 모순에 부딪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해 준다. 일관된 인식의 틀은, 내게 필요한 도구이지만 급변하는 세계를 온전히 담아내기엔 불충분한 도구다. 내 세계관에 아직 담기지 않거나 그 자체로 불가해한 요소가 존재한다면, 그것에 억지로 내 세계관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내 인식 바깥의 더 넓은 지평을 바라볼 때는, 온갖 모순을 빚어내는 불확정성에 낙담하기 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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