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5주년을 맞은 한 소년 만화의 주인공은 '원피스'라는 이름의 보물을 찾아 나선다. 그것의 실체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심지어 그 보물이 숨겨진 장소도 알 수 없다. 고무인간이라는 소재에 이끌려 계속 보다 보니 그런 점이 의아했다. 어떻게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해적질을 일삼다가 체포되어 처형대에 오른 사람이 남긴, 한 마디 말만 듣고 위험한 여정에 오를 수가 있는 거지? 만약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감당하기 벅찬 시련을 마주했을 때, 무모하게 도전하기 보다는 무력하게 도망쳤을 듯하다. 이렇게 한숨 섞인 혼잣말을 하면서. "내가 지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보물을 찾아보겠다고 지금 뭐 하는거지? 그 아저씨가 농담한 거면 괜히 나만 바보 되는 거 아냐?"
그곳은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진짜 장소들은 대부분 그렇다.
- 허먼 멜빌
하지만 멜빌이 남긴 이 말을 보니, 만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가 그렇게 유별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백엔드 개발자가 되기를 바라며,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직업을 일컫는 그 이름이 내가 가보고 싶은 '진짜 장소'는 아니다. 그곳은 백엔드 개발자 로드맵에도 없고, 슈퍼 컴퓨터로 광활한 웹 공간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상상 속 공간이다. 내게 그곳은 지갑을 여는 두 엄지 손가락이 난감하지 않은 곳.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곳. 무엇보다 내가 하는 일을 즐기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백엔드 개발자'라는 이름, 그것은 하나의 이정표 아니면 경유지일 테다. '진짜 장소'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확실한 보증 없이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만화의 주인공과 나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심하지 말자. 그 의심을 핑계삼지 말자. 그 핑계로 내 선택을 부정하지 말자.
그 만화의 주인공은 '해적왕'을 가장 먼 발치의 이정표로 삼고 있다. 그가 내리는 그 이름의 정의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다. 너무 추상적이고 심지어 이상적이기까지 한 목표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그가 떠나온 여정의 종착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만화에 푹 빠진 계기는 '원피스'라는 수수께끼의 보물, '해적왕'이라는 멋진 목적의식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울림을 준 것은 작가가 그를 부르는 이름이다. 즐기는 사람, 조이 보이.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게 있을런지는 몰라도, 즐기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건 분명히 있다.

이상에 견주는 잣대로만 여기기에는 현실이 너무 아깝다. 이미 그 자체로 즐길 만한 '진짜 장소'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곳은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으니,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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