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 두 번째 길
가수 윤하. 일찍이 데뷔해서 꾸준히 활동해 온 만큼 내가 즐겨 듣는 그녀의 노래도 많다. 그 중 가장 공감이 많이 되는 노래는 "스물 두 번째 길"이다.
https://youtu.be/vx8zBqLr4Kw
스물 두 살일 때 이 노래를 알게 되었고, 그 해 연말에 어쩌다 보니 가장 많이 듣게 되었다. 21개월 군생활을 끝내고 유럽 배낭여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스마트폰에다가 음악을 저장해 가는 것이었다. 여행 기간 동안 유심을 사다 쓰는 입장이라, 데이터를 아껴야 했기에 미리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거기 가면 구경하기 바쁠 텐데 굳이 음악 많이 담아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귀찮음이 몰려왔고, 즐겨 듣던 몇 곡만 담아서 갔다. 막상 가서는 '내가 왜 그랬을까...' 살짝 아쉬웠다.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지나며 국경을 넘나드는 동안, 원래는 다음 여행지에서의 계획을 짤 생각이었지만, 네트워크 연결이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에서만큼 원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국경을 넘을 때마다 국가가 바뀌면서 유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구간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버스 여행은 음악 듣는 시간이 되었다. 다른 노래들의 익숙함에 질려가는 와중에도, 이 노래의 익숙함은 편안함을 줘서 거의 이 노래를 들었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어디로 가고 있을까
눈을 뜨고 맞은 아침엔 더 이상은 새로움이 없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저께는 "Excuse me."를 들었고, 어제는 무슨 말인지 모를 독일어를 들었고, 오늘은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언어 속에 있는 내가 이 가사에 꽂힌다는 게. 지금 하는 건 내 삶과 분리된 잠깐의 유랑일 뿐이고, 커다란 맥락에서 내가 계속 방랑하고 있다는 점이 못내 불안한 것은, 머나먼 타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3년이라는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수가 듣는 이를 감화시키는 사람이라면, 나는 가수 윤하의 노래 중 이 노래로부터 가장 많이 감화를 받은 셈이다. 이별 후의 심정이나 비 내리는 날의 정조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공유되는 감각이 아니라, 내가 줄곧 해 오고 있는 만성적인 고민에 관한 감각을 다루고 있는 노래다. 여행하던 당시에는 그 고민이 일시적인 것이리라 믿었지만...
# 여섯 번째 앨범
그런 노래를 직접 쓰고 불렀던 그녀가 며칠 전 새로운 앨범을 냈다. 정말이지 거를 타선이 없는 앨범...까지는 아니지만 5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는 최고의 작품이다. 누군가의 새 앨범이 이토록 반갑고, 그 반가움이 며칠 넘게 지속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https://youtu.be/Qkk8LVMroIA
End Theory. 종료, 상실, 마지막, 모든 종류의 끝에 관한 그녀의 이론. "스물 두 번째 길"에서 방황하고 불안해 하던 그녀는, 이제 덤덤히 자기가 걸어왔던 길을 기억 속에 묻어두고, 담대히 앞으로 걸어갈 길을 마음 속에 그려내고 있다. "스물 두 번째 길"에서 자연 현상이 암시해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무미건조한 정지 상태에 있던 그녀는, 이제 자연 현상이 일깨우는 감각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며 큰 그림을 색칠하고 있다. 끝에서 새로이 이행해 갈 또다른 시작에 대한 가능성을 펼치는 작품. 그래서 반가운 게 아닐까?
아주 좋은 메시지와 분위기로 가득한 노래들이지만, 애석하게도 공감은 아직 잘 안 된다. "스물 두 번째 길"의 이야기가 내것과 닮아 있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앨범의 수록곡들은 내것과 다르기에 닮고 싶은 바람만 생긴다. 모든 새로운 이론들이 그렇듯, 그녀의 메시지는 곧바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 아니라, 일단 공유되고 난 뒤에 그게 잘 맞는지 새로운 경험에 비춰 점차 확인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무언가가 끝난다는 것이 곧 삶이 끝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가슴으로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이론'이 '끝'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쌓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여기로 가다 보면
결국 끝은 오겠지
그대가 날 발견해 주기 전엔
- Savior 중에서 -
# 거를 수 없는 타선
2. 나는 계획이 있다 - 3. 오르트구름 - 4. 물의 여행 - 5. 잘 지내 - 6. 반짝, 빛을 내 - 11. Savior
0. 스물 두 번째 길 : 이 곡을 들으면 알아볼 수 없는 표지판과 낯선 풍경으로 가득한 고속도로 위, 버스 안에 있던 그때가 떠오른다.
나중에 2, 3, 4, 5, 6, 11 을 들으면 어떤 추억 아니면 기억이 떠오를지 궁금하다.
'음악이 주는 여흥을 담는 찻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일이 무거울 때 <응원가> (0) | 2021.12.20 |
---|---|
겨울, 그리고 <시간과 낙엽> (0) | 2021.12.02 |
꼭 급하게 필요할 때만 없는 <빈 차> (0) | 2021.10.26 |
유산소 운동 같은 상쾌함. <Running> (0) | 2021.09.24 |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0) | 2021.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