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함을 뒤적이다 마지막 페이지로 가 본다. 그때 먹던 급식의 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메일들 속에서 뜻밖의 발견을 한다.

고3 여름이었다. 7월에 사설 모의고사를 치르고 처음으로 반에서 1등을 했다. 2등급과 3등급 사이를 오가던 국어에서 갑자기 1등급이 나온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대뜸 '국어 성적 향상의 비법'을 반 친구들에게 공유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운 좋게 주사위가 6이 뜬 것에 무슨 비법이랄게 있는가 싶은 생각이었다. 어쩌다 얻어걸린 결과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주석을 다는 일이 참 어려웠다. 롤 얘기 하면서 장난치던 친구들, 모르는 거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하던 친구들 모두가 예상 독자라는 점 또한 곤란했다. 나름대로 가벼움과 진중함 사이에서 완급 조절을 하느라 애먹었다. 그러다보니 야자 끝나고 집 가자마자 쓰기 시작했는데도 어느덧 원래 자야 할 시각을 넘겼다. 그러다 보니 새벽감성에 젖어서 평소 공부에 관해 갖고 있던 철학을 글의 말미에 덧붙이기에 이른다.

공부를 하면서 맞닥뜨리는 고통의 순간마다 종종 찾아오는 의문이 있다. "내가 재능이 없는 건가?" "이게 내 적성과는 안 맞는 건가?" "아, 너무 늦게 시작했나?" 그러면 실존적 선택의 두 갈래 길이 눈 앞에 놓인다. 상황과 타협하며 이 고통을 회피할 것인가, 이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을 단련할 것인가. 나는 그 당시 친구들이 후자를 선택하길 바라며 위 글을 덧붙였던 것 같다. 공부 외에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즉 공부의 기회비용이 크지 않다면, 공부를 하는 게 최선이니까.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첫 직장을 갖고 어느새 1년이 조금 지났다. 1년 전까지는 취업이 머릿속 전부였는데, 지금은 생존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격동기라고 할 만큼 발전이 빠르고, 과도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전환이 일어나는 이 시기. 내가 더 잘, 더 오래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배움, 단련, 그리고 고통을 일상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는 듯하다. 여전히 세계에 종속되기 보다는 세계와 연결되고 싶으니까. 나를 버리고 세계에 끼워 맞춰지기 보다는, 세계와 함께 존재하고 싶으니까. 그럴 만한 능력과 자격을 갖춘 내가 되어야 한다. 점진적 과부하를 통해 성장하는 일을 삶의 시스템에 도입해야 한다.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수기를 남기거나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성취를 남기지는 못했다, 아직은. 온갖 종류의 산발적이거나 주기적인 고통, 그리고 만성적인 고독을 일단은 당연시하고 직면해 나가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왜냐면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까. 배움의 자세로 사는 삶에는 종종 즐거움을 만끽할 기회도 따라오는 것 같으니까. 지난 10년간 쓸 일이 없었던 수기글을, 앞으로의 10년만큼은 쓸 일이 있기를 바란다.
https://youtu.be/GaRVSWDcvnA?si=xGNJwumYVsbKRC79
기왕 살게 된 감사한 인생, 더 깊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도록, 자알 놀다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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