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버 진용진 님의 '없는영화'는 볼 때마다, 익숙한 삶의 단면을 정말 잘 녹여낸 작품 세계 속에 몰입하고, 그 여운을 오래 간직하는 편이다. 그의 작품이 이번에는 내가 사회에 갖고 있던 가장 큰 문제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https://youtu.be/MalnKOx5i_Q
정말 이대로 쭉 가면 안 괜찮을 것 같다. 도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린 걸까?
# 소확쾌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며, 가치있는 존재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오프라인에서 이같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선택에는 큰 불확실성이 내재한다. 모종의 위험을 감수하고 시간, 노력 등의 비용을 투자할 대상이 한정적이며, 성패 여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속한 맥락이나 마음 상태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불확실하다. 반면 온라인에서는 누군가에게 "저에게 관심 좀 주십사" 하고 말로 청하는 게 아니라, 일단 글을 써 놓으면 그 글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반응해 준다. 어장이 비교할 바 없이 넓어지므로, 그물에 기꺼이 걸려드는 물고기들도 많아지는 것이다. 심지어 그물을 놓는 데에는 비교할 바 없이 적은 노력이 들어간다. '짧으면 짧을수록 더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이제 인터넷의 법칙으로 자리잡았다. 목 마를 때 당장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물 한 컵 같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공간, 바로 인터넷이다.
# 대의를 위하여!
관심 끌기에 관한 또 한 가지 법칙은 '싸움 구경이 가장 재밌다'이다. 키보드 배틀은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온라인 상에서 익명의 누군가를 잡아다 패면서 풀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용한 게임 방식이다. 하지만 1:1 혹은 소규모 개인 간 다툼에 사람들이 건네는 관심은 점점 사라졌으며 '병먹금'이라는 말과 함께 고갈되었다. 가장 자신 있는 온라인 난투극을 관람해줄 팬을 잃어버린 파이터들은 갖은 프레임과 구호를 빌려오며 '내가 너의 편이 되어서 대신 싸워줄게'를 시전한다. 학벌, 지역, 세대, 성별 등 다양한 프레임으로 진영을 나누고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전까지 오프라인에서 국지적으로만 발생하던 갈등을 온라인 영역까지 끌어들이면서, 키보드 워리어들은 심리적으로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이 '할 짓 없어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시비 걸고 다니는 잡배'가 아니라 '상대 진영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진영을 수호하는 영웅'으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 웬말?
키보드워리어들이 행진할 때 들고가는 깃발에 적힌 학벌, 지역, 세대, 성별 등은 한 개인을 나타내는 범주 또는 개인이 소속된 집단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을 나타내는 이 표식은 거의 바뀔 일이 없다. 지방대 다니다가 수도권 대학에 들어간다거나, 성 전환을 하지 않는 이상. 그래서 개인이 가진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매김한다. 온라인 전쟁터에서 진영을 선택할 자유는 거의 없으며, 내가 속한 진영이 지고 있으면, 우리 편이 지고 있어서 속상하거나, 내가 패자들과 같은 범주 및 집단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불편해지기도 한다. 심지어 스마트폰 보급의 확대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확산을 거치면서, 일상에서 인터넷 공간 속 치열한 공방전을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저 사람들은 할 일이 저렇게도 없나'며 딴 세상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일상 속 너무 많은 순간에 내게 노출되고, 어느새 스며들게 된다. 세상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은데, 우리 편이 지고 있는데 잠자코 있을 수는 없지!
#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인터넷 공간은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배출하는 공간이다. 누가 그러자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익명성이 '그렇게 해도 된다'는 의식을 부추겼다. 아직은 뚱뚱한 CRT 모니터로만 인터넷을 접할 수 있던 그 시절까지는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일상의 점유율, 세상을 이해하는 매체로서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낮았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한낱 쓰레기통에 불과했던 그 공간은 어느새 쓰레기장이 되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무기는 역시 쓰레기다. 그 전쟁에는 누구나 '쓰레기를 정화한다'는 정의감에 참여하지만, 대개는 <무한도전: 의상한 형제들> 특집처럼 '쓰레기 돌리기'에 불과하다.
# 진정한 메타버스
온라인 공간의 흐름이 오프라인 세상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제 한 개인이 저지른 잘못은, 그 개인이 속한 진영을 비난하기에 딱 좋은 재료가 되며, 특정 범주 및 집단의 오점으로 일반화된다. 이제 불확실성과 비용을 감수할 만큼 호감이 가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친구보다 먼, 초면보다는 가까운 사람'에 관한 무지를 소통으로 해소하기 보다는, 그간 인터넷에서 습득한 편견으로 대체한다. 그렇게 어정쩡하게만 아는데 굳이 깊이 알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은, 더욱 더 경계의 대상이 된다. 아담 스미스는 말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빵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제빵사들의 헌신 덕택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간편하고 위험부담 없이 쾌락을 얻고자 한 몇몇 사람들의 전쟁놀이 덕택에, 우리는 매일 쓰레기들이 날리는 전쟁터 속에서, 세상에 대한 의식을 형성한다. 적잖은 시간을 그렇게 보낸다. 그러는 와중에 썩은 의식은 일상 속 판단과 행동의 준거가 되어가고 있다.
생각이 더욱 집단화될수록,
개인은 더욱 파편화되고 있는 이 현실.
그 현실을 너무나도 잘 꼬집은 기획이었다.
'영화가 남긴 여운을 담는 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예쁜 꿈도 꾸었집 <Up> (0) | 2023.03.06 |
---|---|
확실함을 원한다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0) | 2022.07.11 |
지금 누가 째깍 소리를 내었는가? <틱,틱...붐!> (0) | 2022.05.19 |
공간의 선택, 선택의 공간 <매트릭스 1, 2, 3> (0) | 2022.01.11 |
희망과 기만의 경계에서 <쇼생크 탈출> (0) | 2021.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