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의 움직임은 자유롭기 보다는 본능적이다. 마부에게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배고프면 먹이를 알아서 찾아 먹고, 달려야겠다는 삘이 올 때면 네 다리로 광야를 누빌 것이다. 반면 너무 잘 길들여져서 순종적인 말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당근을 먹지 않은 말은 활력을 잃을 테고, 채찍을 맞지 않은 말은 근손실을 맞을 테다.
오늘은 두 멘티 중 한 사람에게 중요한 날까지 2년 2개월 22일 남은 날이었다. 바로 2025학년도 수능. 멘티가 다음 10회기 동안에도 나와 함께하겠다고 답한 뒤 처음 보는 오늘인데, 그런 의미까지 보태지니까 괜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멘티는 약속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10분쯤 기다리다 전화하니 그는 말한다. 곧 도착할 것 같다고. 곧. 그 곧이 정확히 얼마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인지 추측하면서 시간을 떼우라는 배려로 여겨야 하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설마 이 친구가 센스 있게 약속 시간 22분 뒤에 오려나? 15분, 20분... 설마? 하지만 멘티는 약속 시간으로부터 21분이 지난 시각에 딱 도착했다. 살짝 아쉬웠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2번의 만남에서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실망했었는데, 이번에도 그 밀린 숙제를 깜빡해서, 이제는 화가 났다. 제갈량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가서 2번까지만 거절당한 유비였더라도 화를 낼 만한 상황 아닌가. 지난 시간에 복습과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을 설명해주었는데도, 인간의 탁월한 망각 능력을 몸소 입증하는 것을 보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금 하고 있는 멘토링의 무늬는 봉사활동이고, 생산적인 명분은 '설명하는 능력 키우기'이지만, 사실은 자기만족의 수단이 필요해 시작한 일이다. 지금껏 살면서 가장 열정적이었고, 꾸준했으며, 일련의 성취 과정 속에서 보낸 나날이 바로 고등학교 3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그 시기가 그리운 요즘, 그 기억을 긍정적인 기분과 함께 곱씹어 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내가 쌓았던 노력이 누군가에게 가치를 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 결국 나 자신에게 당근을 주고 싶은 욕심이었던 것 같다. 그게 좌절되고 나니,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좀처럼 '아니요'라고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그 친구에게 물었다. "이 멘토링이 너한테 중요하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내심 '아니요'라고 답하기를 바랐다. 멘티는 답했다. "네."
이번에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의기소침한 대답. 지각과 숙제 빼먹기가 앞으로도 흔한 일이 되리라는 신호로 다가왔다. '역시 이 친구랑은 내가 잘 안 맞는 걸까?' 생각이 들었는데, 내 멋대로 미동 없는 이 친구를 멀리하려는 게 아닌가 반문했다.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멘티에게서 원인을 찾아도 될 만큼 최선을 다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직설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그동안 이 친구를 더욱 위축시키지 않을까 싶어서 아껴두었던 잔소리를.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게임인 롤에 비유하지 않고.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거의 막바지 즈음에 멘토가 말했다. "아는 문제만 푸는 건 열심히 하는 게 아니야. 아는 문제만 풀어서 편하게 만족감 느끼는 것일 뿐이지, 네가 바라는 대로 성적을 올리고 싶으면 모르는 문제를 마주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해. 그러니까 매 순간마다 너에게 당근을 줄 지, 채찍질을 할 지를 결정하는 건 바로 너 자신이야." 멘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멘토는 물었다. "별로 안 와닿지?" 멘티는 답했다. "네." "어떤 부분이?" "행복을 제가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요. 행복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에 있는데요."
그 친구의 입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아니기에, 나는 그의 말이 맞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에도 행복은 있어. 단지 네 시야에는 멀리 있는 행복만 있어서, 안 보이는 것뿐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에게 와닿는지 여부를 묻지 않았다. 나는, 그가 공부가 마냥 즐거운 것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열심히 해도 성적이 늘지 않아서' 공부가 점점 더 즐겁지 않게 되고, 불리한 조건 속에서 남들과 경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해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워서' 공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걸 막고 싶었다. 자신의 부족함과 실패를 마주하는 게 진짜 공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 역시 '어려운 것은 나중에, 안 될 것 같은 것은 과감히 포기' 마인드로 지난 20개월을 보내오지 않았던가? 이상적인 상황만 바라면서. 그를 향한 잔소리는 사실 지금까지의 내게 더 필요한 것이었다.
면밀히 따져 보면, 나는 멘토로서 그 잔소리를 할 자격이 더더욱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며칠 전, 방을 정리하다가 고등학교 3년간의 모의고사 성적표들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나는 나의 수험생활을 두고 '중학교 때는 칠판 앞에서 망신을 당할 만큼 수학을 못했지만, 꾹 참고 공부해서 마지막에는 만점을 받게 되었다'는 포장을 덧대고 있었다. 그 포장을 내가 멘토로서의 적임자라는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의 3년만 놓고 보면 수학에서만큼은 1등급이 항상 나와주는 케이스였다. 노력한 만큼 나와주는 수학 성적 덕택에 꾸준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야자를 강제로 시키는 학교라서, 22시까지 쭉 공부하는 것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시절 내게 당근과 채찍을 주면서 나를 길들인 것은, 내가 아닌 외부 환경이었다.
첫 만남 때 멘티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공부를 자꾸만 안 하게 돼요." 멘토는 답했다. "공부를 꾸준히 하는 애들은 그게 습관이 돼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것뿐이야. 네가 별 생각 없이 컴퓨터를 킬 때, 걔네들은 문제집을 펴는 거지. 습관이 될 때까지만 노력하면 돼" 그때도 멘티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멘토는 자기가 했던 말도 까먹고, '이 길이 내 적성이 아닌 건가?' 같은 시덥잖은 고민만 하고 있다. 자기주도학습의 더욱 생동감 있는 경험과 시도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자기 스스로 당근과 채찍을 주는 마부가 되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일방적으로 해야할 일과 공략집을 던져주는 수업이 편한 멘티에게도, 그 친구와 전혀 다르지 않은 나에게도.
아무런 고민, 걱정 없이 먹고 달리는 야생마가 부러울 때가 있다. 생존과 실존이 자연스레 이뤄지는 편한 삶처럼 보이니까. 그러나 나는 야생마가 아니다. 본능을 거스르는 이성을 장착한 시점부터 그랬고, 이성의 간곡한 경고에 딴지를 거는 재주로 머리가 굵게 된 시점부터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마부가 필요하다. 행운이 준비된 자에게 오는 것이라면, 적절히 자기 통제를 하는 것이 그 준비이다. 물론 매 순간마다 자기의 선택만으로 자신에게 주는 당근과 채찍의 양을 균형잡히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 길들일 습관이 그다지 와닿지 않거나, 기존의 습관을 지속하기 힘든 때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니까. 그때에는 말을 적당히 어르고 달래서 속도를 늦추되, 말에서 아예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말은 야생마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