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각할 뻔했다. 몇 년만에 수강하는 9시 대면 강의. 07:30에 맞춰둔 알람이 1시간 동안 울린 뒤에야 깨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자 푹 눌러쓰고 체력 검정의 기억을 되살리며 뛰어서 도착한 강의실 시계의 시침은 9를, 분침은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해 보는 대면 강의라고 밝히신, 젊은 교수님께서는 출석을 부르시지 않았다.

교수님께서는 지난 태풍과 앞으로의 연휴 때문에 진도 나가는 것이 빠듯하다는 말씀으로 짧은 OT를 마치셨다. 곧바로 시작된 수업은 예상과 달리 웹의 역사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진도 나가기 바쁜데 왜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 리 이야기를 하고 계신지 의아했다. 모자를 벗는게 예의인 것 같아 맨 뒷자리 구석에 앉으니 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얼른 앞으로 할 실습에 필요한 내용을 다루셨다면, 저 사람들도 깨어있지 않았을까?

교수님께서는 HTML의 HyperText에 하필 Hyper가 붙은 이유는, Hyperlink 와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링크(하이퍼링크)가 있었기에 웹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는 말씀. 아이피 주소나 도메인을 글쓴이가 적어놓고, 독자가 그걸 복사해서 주소창에 붙여넣는 수고로움이 사라진 것이 커다란 진보였다는 말씀. 이 대목에서 잊고 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약 2년 전 유튜브 생활코딩 채널 이고잉님의 영상을 봤던 기억. 그 영상은 내가 개발자의 세계에 들어오는게 좋은 선택일지에 관해 확신을 줬지 참.

그때의 이고잉님과 지금의 교수님은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웹의 시작과 발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멋진 세계에 있는 것인지. 서로 같은 두 이야기를 듣는 건데, 그때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이었고, 지금까지의 나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게 이상했다. 내 사고 방식이나 태도가 너무 조급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세계에서 밥 벌어 먹고 살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물론, 당면한 최우선 과제이지만, 어쨌든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놀랍고 멋진 곳임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지난 2년간 발전하는 언어와 기술을 보며 내가 이렇게 영영 뒤쳐질 것 같아 두렵기도 했지만, 그 발전 역시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나보다 한참 앞서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스스로 초라함을 느꼈지만, 멋진 사람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 들어올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괜히 맥 빠지게 출첵을 건너뛰신 교수님께서는, 내가 잊고 있던 웹 세계의 경이로움을 상기시켜 주셨다. 앞으로 수업에서 새로 배울 낯선 언어들이 부담스럽기 보다는 설렘으로 다가왔다. 예전에 수학의 정석을 보고 품었던 마음. 예전에 롤 챔피언 ‘이렐리아’ 장인의 공략글을 보고 품었던 마음. 아마도, 멋진 것을 재현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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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나스닥 차트가 폭포수마냥 떨어졌고, 오늘 코스피 차트는 궤적조차 없이 아래로 순간이동 했다. 그것을 보고 심장이 철렁한 개미는 소유하고 있던 주식을 전량매도했다. 10% 안팎의 손절컷을 두고 있는 그 개미의 거래 내역에는 지난 1년간 자잘한 마이너스로 가득하며, 그것이 커켜이 쌓여 이제는 적잖은 손실만이 남아있다.

손절이냐, 존버냐. 손절은 대상을 계속 붙잡을 때 발생할 기대수익이 마이너스일 때 하는 것이고, 존버는 플러스일 때 한다. 기대수익이라는 개념이 오직 돈에만 국한한 것일 수도 있고, 모종의 신념이나 애착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을 주식 매매를 결정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선택의 순간에도 계속 차용한다면,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까?

기대수익은 주관적으로 책정된다. 대상을 멀리하고픈 마음이라면 대상의 단점만 부각될 것이다. 다르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대상의 단점이 거슬리니까 대상을 멀리하고 싶은 거라고.

그런데 문제는 ‘닭이냐 달걀이냐’ 논쟁과는 별개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증편향’이라는 녀석이 독단적인 선택과 비뚤어진 자의식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언젠가부터 단점만 바라보는 짧은 눈동자 속에 비친 대상은, 말도 섞기 싫은 사람, 가고 싶지 않은 장소, 피하고만 싶은 상황이 되어버린다.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자료와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몸부림 속에 치명적인 비합리성이 깃들 수 있는 셈이다.

나는 평일 5시마다 문을 열러 가는 가게가 싫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떠올린 10년 뒤의 나는 가게 문을 영영 닫아도 되게 하는 사람이었지, 가게 문이라도 대신 열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꿀 같은 저녁 시간이 캘린더에서 사라지는 것도 여전히 달갑지 않다. 무엇보다 가게에 있으면 찾아드는 기시감이 끔찍하다. 앞으로도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

2년 전 기꺼운 마음으로 시작한 가게 일 돕기였지만, 1년 전부터 나는 가게에서 마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가게 문 앞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일수꾼들이 던지고 간 종이에도 심기가 불편하고, 손님들의 웃는 얼굴에도 왠지 씁쓸함이 베어 있는 듯 보였으며, 가게 안이 왁자지껄하면 시끄러워서 화가 나고, 적막하면 휑해서 화가 났다.

그럼에도 오늘 가게를 갈 수밖에 없었던 것, 앞으로 한동안 계속 가게를 가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한층 더 못난 놈으로 만들었다. 결국 능력이 모자라서 내가 원하는 선택도 못 하는구나.

못난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들 노릇 하기 위해서 놓을 수 없는 이 책임이 너무나 큰 부담을 주고 있다. 그런데 그 부담은 과장된 것이다. 가게는 멀뚱히 선 채로 십 여년 간 그 자리에 서 있지만, 거기에 온갖 단점들로 살을 붙인 건 나의 비뚤어진 마음이다. 그래서 가게가 감당하기 싫은 마음의 짐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게 참 놀라울 따름이다.

여전히 가게는 우리 가족에게 필수 요소이고, 존재 자체로 행운이며, 앞으로도 함께 가야 하는 대상이다. 세 단락에 걸쳐 늘어놓은 불평은 가게의 단점이 아니라, 내가 잡은 트집이라고 봐야 공정하다. 그리고 색안경을 벗어야, 매일을 그곳에서 보내는 내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도망치는 것이 딱 한 번 허용된다면, 그건 가게라는 장소, 그 속의 나, 반복되는 일상의 불만족이 아니라, 확증편향으로 가득한 잣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어야 한다. 앞으로 나의 삶은, 주식처럼 유동성이 높은 것들보다는, 가게처럼 탈부착이 어려운 중요한 것들로 가득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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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마의 움직임은 자유롭기 보다는 본능적이다. 마부에게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배고프면 먹이를 알아서 찾아 먹고, 달려야겠다는 삘이 올 때면 네 다리로 광야를 누빌 것이다. 반면 너무 잘 길들여져서 순종적인 말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당근을 먹지 않은 말은 활력을 잃을 테고, 채찍을 맞지 않은 말은 근손실을 맞을 테다.

오늘은 두 멘티 중 한 사람에게 중요한 날까지 2년 2개월 22일 남은 날이었다. 바로 2025학년도 수능. 멘티가 다음 10회기 동안에도 나와 함께하겠다고 답한 뒤 처음 보는 오늘인데, 그런 의미까지 보태지니까 괜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멘티는 약속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10분쯤 기다리다 전화하니 그는 말한다. 곧 도착할 것 같다고. 곧. 그 곧이 정확히 얼마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인지 추측하면서 시간을 떼우라는 배려로 여겨야 하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설마 이 친구가 센스 있게 약속 시간 22분 뒤에 오려나? 15분, 20분... 설마? 하지만 멘티는 약속 시간으로부터 21분이 지난 시각에 딱 도착했다. 살짝 아쉬웠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2번의 만남에서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실망했었는데, 이번에도 그 밀린 숙제를 깜빡해서, 이제는 화가 났다. 제갈량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가서 2번까지만 거절당한 유비였더라도 화를 낼 만한 상황 아닌가. 지난 시간에 복습과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을 설명해주었는데도, 인간의 탁월한 망각 능력을 몸소 입증하는 것을 보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금 하고 있는 멘토링의 무늬는 봉사활동이고, 생산적인 명분은 '설명하는 능력 키우기'이지만, 사실은 자기만족의 수단이 필요해 시작한 일이다. 지금껏 살면서 가장 열정적이었고, 꾸준했으며, 일련의 성취 과정 속에서 보낸 나날이 바로 고등학교 3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그 시기가 그리운 요즘, 그 기억을 긍정적인 기분과 함께 곱씹어 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내가 쌓았던 노력이 누군가에게 가치를 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 결국 나 자신에게 당근을 주고 싶은 욕심이었던 것 같다. 그게 좌절되고 나니,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좀처럼 '아니요'라고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그 친구에게 물었다. "이 멘토링이 너한테 중요하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내심 '아니요'라고 답하기를 바랐다. 멘티는 답했다. "네."

이번에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의기소침한 대답. 지각과 숙제 빼먹기가 앞으로도 흔한 일이 되리라는 신호로 다가왔다. '역시 이 친구랑은 내가 잘 안 맞는 걸까?' 생각이 들었는데, 내 멋대로 미동 없는 이 친구를 멀리하려는 게 아닌가 반문했다.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멘티에게서 원인을 찾아도 될 만큼 최선을 다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직설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그동안 이 친구를 더욱 위축시키지 않을까 싶어서 아껴두었던 잔소리를.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게임인 롤에 비유하지 않고.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거의 막바지 즈음에 멘토가 말했다. "아는 문제만 푸는 건 열심히 하는 게 아니야. 아는 문제만 풀어서 편하게 만족감 느끼는 것일 뿐이지, 네가 바라는 대로 성적을 올리고 싶으면 모르는 문제를 마주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해. 그러니까 매 순간마다 너에게 당근을 줄 지, 채찍질을 할 지를 결정하는 건 바로 너 자신이야." 멘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멘토는 물었다. "별로 안 와닿지?" 멘티는 답했다. "네." "어떤 부분이?" "행복을 제가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요. 행복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에 있는데요."

그 친구의 입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아니기에, 나는 그의 말이 맞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에도 행복은 있어. 단지 네 시야에는 멀리 있는 행복만 있어서, 안 보이는 것뿐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에게 와닿는지 여부를 묻지 않았다. 나는, 그가 공부가 마냥 즐거운 것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열심히 해도 성적이 늘지 않아서' 공부가 점점 더 즐겁지 않게 되고, 불리한 조건 속에서 남들과 경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해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워서' 공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걸 막고 싶었다. 자신의 부족함과 실패를 마주하는 게 진짜 공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 역시 '어려운 것은 나중에, 안 될 것 같은 것은 과감히 포기' 마인드로 지난 20개월을 보내오지 않았던가? 이상적인 상황만 바라면서. 그를 향한 잔소리는 사실 지금까지의 내게 더 필요한 것이었다.

면밀히 따져 보면, 나는 멘토로서 그 잔소리를 할 자격이 더더욱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며칠 전, 방을 정리하다가 고등학교 3년간의 모의고사 성적표들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나는 나의 수험생활을 두고 '중학교 때는 칠판 앞에서 망신을 당할 만큼 수학을 못했지만, 꾹 참고 공부해서 마지막에는 만점을 받게 되었다'는 포장을 덧대고 있었다. 그 포장을 내가 멘토로서의 적임자라는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의 3년만 놓고 보면 수학에서만큼은 1등급이 항상 나와주는 케이스였다. 노력한 만큼 나와주는 수학 성적 덕택에 꾸준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야자를 강제로 시키는 학교라서, 22시까지 쭉 공부하는 것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시절 내게 당근과 채찍을 주면서 나를 길들인 것은, 내가 아닌 외부 환경이었다.

첫 만남 때 멘티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공부를 자꾸만 안 하게 돼요." 멘토는 답했다. "공부를 꾸준히 하는 애들은 그게 습관이 돼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것뿐이야. 네가 별 생각 없이 컴퓨터를 킬 때, 걔네들은 문제집을 펴는 거지. 습관이 될 때까지만 노력하면 돼" 그때도 멘티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멘토는 자기가 했던 말도 까먹고, '이 길이 내 적성이 아닌 건가?' 같은 시덥잖은 고민만 하고 있다. 자기주도학습의 더욱 생동감 있는 경험과 시도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자기 스스로 당근과 채찍을 주는 마부가 되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일방적으로 해야할 일과 공략집을 던져주는 수업이 편한 멘티에게도, 그 친구와 전혀 다르지 않은 나에게도.

아무런 고민, 걱정 없이 먹고 달리는 야생마가 부러울 때가 있다. 생존과 실존이 자연스레 이뤄지는 편한 삶처럼 보이니까. 그러나 나는 야생마가 아니다. 본능을 거스르는 이성을 장착한 시점부터 그랬고, 이성의 간곡한 경고에 딴지를 거는 재주로 머리가 굵게 된 시점부터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마부가 필요하다. 행운이 준비된 자에게 오는 것이라면, 적절히 자기 통제를 하는 것이 그 준비이다. 물론 매 순간마다 자기의 선택만으로 자신에게 주는 당근과 채찍의 양을 균형잡히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 길들일 습관이 그다지 와닿지 않거나, 기존의 습관을 지속하기 힘든 때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니까. 그때에는 말을 적당히 어르고 달래서 속도를 늦추되, 말에서 아예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말은 야생마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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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말하는 법, 영어로는 Law죠. 법은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2년 전, 위드코로나 이후 2번째 학기 개강을 맞아 법경제학 시간에 교수님께서 질문을 던지셨다. 좌중이 숙연해지자 교수님께서는 한 말씀 더 보태셨다. "다들 이러면 제가 직접 호명하는 수밖에 없어요. 오늘은 맨 뒷 번호부터 불러볼까?" 그 순간 느낌이 싸했다. 곧바로 교수님의 입에서 나온 세 글자는 바로 내 이름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대로 말을 했다가는 엄청 더듬을 것 같아서 서둘러 키보드를 두들겨 Zoom 채팅에 남겼다. "다양한 경제주체 간에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성문화된 규칙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요즘 보기 드물게 문어체를 사용하는 학생인데, 대답까지 교과서처럼 하네요." 나는 그 순간 적잖이 뿌듯했다. 평소에 많이 하던 잡생각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구나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마주한 세상은 너무나 복잡한 곳이다. 오지선다형이 아닌 서술형 및 실천형 문제가 나도 모르는 새에 갑자기 주어지기도 하고, 내가 고심 끝에 꺼내놓은 답안이 정답인지도 알 수 없는 곳이다. 이런 뒤죽박죽 세상 속에서 나를 바로 세워줄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시험 문제에 정답이 있듯이, 세상에는 보편타당한 진리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그 시작이었다. 게으른 공상 끝에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규칙을 지키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 규칙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1년 전에 본 드라마에서 한 변호사는 행동으로 반박했다. "규칙만 지켜서는 세상을 옳게 바꿀 수 없다." 빈센조 변호사는 대한민국의 사법 제도는 답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법이 하지 못한 심판을, 마피아의 방식대로, 법정 바깥에서 아주 참신하게 집행했다. 반면 오늘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에서 이상한 변호사는 법을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믿는다. 법 앞에서 거짓되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신념은, 의뢰인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보통 변호사의 책임과 마찰을 빚는다.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는 동안 법은 부조리를 정의롭게 심판하는 데에 실패하기도 한다. 그때 느낀 죄책감과 선배 변호사의 격려는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었고, 마지막에는 그녀의 신념을 관철하는 데에 성공한다.

빈센조의 결말은 드라마 속에서 통쾌했지만 현실에서 씁쓸했다. 결국 법 바깥의 힘 다툼과 치밀한 수읽기가 승패를 좌우한다는 이야기니까. 정보, 자본, 권력 등 온갖 종류의 비대칭성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일은 더욱 어려워 보였다. 반면 우영우의 결말은 드라마 속에서도 현실에도 희망을 준다. 일상의 공간에서는 회전문 하나에도 휘청이던 그녀였다. 여전히 법정 밖 세상에서는 흔들리곤 한다. 그럼에도 법이라는 토양 아래 신념을 단단히 뿌리내린 덕택에, 자신만의 리듬으로 세상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내가 사랑해야 하는 한 사람이 '이게 최선이야'라고 타협하며 저지르는 전혀 선하지 않은 행위를 보며 혼란스러웠다. 그에게 차선책을 마땅히 제시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고, 앞으로의 내 미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겼었다. 현실을 핑계로 한 점 떳떳함 없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우영우는 세상 속 자신이 '조금 이상하고 별나긴 해도,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 말이 왠지 용기를 준다. 그녀가 '뿌듯함'이라고 정의내린 찬란한 미소는, 밥 벌어 먹고 살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나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무언가를 거머쥔 사람의 표정과는 다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켜낸 자의 표정이다.

세상의 불문율에는 아랑곳 않고, 자기 규칙대로만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별나다고 말한다. 세상은 법의 규정성 아래 있지만, 법에 의해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우영우만큼 별나게 살아가긴 힘들 것이다.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 갈 땐 가더라도 뿌듯함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 한 잔의 뿌듯함을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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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따금씩 사진첩을 뒤져서야

이 글을 새삼 발견하고 위로를 얻지만,

머잖아 내 삶을 바라보며 이따금씩

이 글을 떠올리게 되는 그날까지,

 

뭣이 부담된다는 둥

아무도 몰라준다는 둥

핑계대며 늘어지지 말고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가자.

열매를 수확하기까지,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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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때마다 뜨끔하는 말이 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공부는 사회라는 거대한 분업 체계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능력과 자질을 체득하기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므로,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나는 주어진 본분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 없다. 내게 공부는 언제나 사명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해 본 공부는, 호기심이 동하고 흥미가 돋아서 하는 공부, 또는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나의 참살이(Well-Being)에 치명적인 위협을 초래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작동해서 하는 공부, 이렇게 두 가지뿐이다.

두 가지 공부 모두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공부는 적당량의 만족을 얻기 위해 적당량의 노력을 투하하는 투자처였다가,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기도 하다. 항상 공부보다는 내가 먼저였던 것이다. 두뇌가 보상과 위험에 민감한 신호 전달 체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부가 내 안위보다 뒷전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공부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생각의 허용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치른 낭패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공부보다 더 자극적인 '온라인 게임'이라는 녀석에 불나방처럼 뛰어들거나, '나의 위기는 부족한 잠/휴식에 있지, 부족한 공부에 있지 않다' 같은 인식의 전환이 기대 효과를 달성했던 경험이 많긴 했던가?

공부라는 녀석도 나와 대등한 위치에 놓아야 하지 않나 싶은 요즘이다. 즐거움이나 위기감을 느껴서 하는 공부도 물론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는 요즘이다. 공부는 행복의 충분조건이긴 하지만 필요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부를 하면 행복에 다가갈 수 있지만, 행복하기 위해 꼭 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을 먼저 생각한다면 언제나 타협의 여지가 존재하게 된다. 공부보다 더 매력적인 대상으로, 혹은 공부보다 더 시급한 사안이 존재한다는 판단으로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다. 따라서 공부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적으로서의 공부, 대체 불가능한 공부는 뭘까? 안 해 봐서 모르겠다. 아마 내가 어엿한 직업인이 되었을 때 마땅히 가져야 할 '세상에 기여하는 몫, 세상에 창출하는 가치'를 대하는 참된 태도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더 모르겠다. 다만 '학생의 본분을 망각하는 사람이 직업인의 본분을 다할 리는 없다'라는 추론은 해볼 수 있다. "너 참 열심히 사는구나"라는 칭찬에 더 이상 뜨끔하지 않았으면.

나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나는 주인의식과 목적의식을 갖고 내가 선택한 일을 해낸다. 나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다. 자기암시가 자기소개가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이 나에게 있어서, 행복의 필요조건이라는 사실만큼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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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참 무겁다.

술에 취하기는 좀 어려운데,

미덕이라는 말도 쫌 어려워서,

공연히 이 시에 쭉 몰입하고 있는

지금이 참 좋다.

 

 

시간의 무게에 시달리다 보면,

까맣게 잊고 지내는 질문들이 있다.

"나는 이 순간에

어떤 조처를, 어떤 태도를, 그리고 어떤 가치를

취하고 있지?"

 

이 질문들에 답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 시간이 지났을 때

놓쳐버린 모든 것들에 대한 미련만이 남을 것이다.

 

지금 취해 있다면,

당장 답을 구하지 않더라도

선명히 떠오르는 빛나는 순간들이 대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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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c언어 강의를 듣는 한 친구가 과제를 도와달라며 연락을 해 왔다. Visual Studio가 scanf 함수에 오류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 문제였는데, 친구의 눈에는 “배운 대로 했는데 왜 안 돼?”였다.

#define _CRT_NO_SECURE_WARNINGS
이 한 문장이면 해결되는 오류였다. 알려주니까 친구는 말했다. “아니 이건 수업에서 안 배운 건데?” 의아해하는 친구에게 답해줬다. “너도 이런 거에 익숙해질 거다” 

#define _CRT_NO_SECURE_WARNINGS
1년 전 이맘때 처음으로 고생 끝에 성공했던 디버깅이다. c언어 수업 과제의 요구사항을 문법에 맞게 다 작성했는데, scanf에 그인 빨간줄이 사라지지 않아 정말 난처했던 적이 있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고, 뭐가 문제 같아도 어떻게 검색해서 해결방법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던 그때, 처음으로 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이런 간단한 과제 하나도 내 컴퓨터에서 동작하게 못하는데 개발자를 하겠다고?

지금까지도 벽을 만날 때마다 마주하는 반문이다. 그렇게 물을 때마다 벽은 내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거울처럼 된다. 벽을 마주하기 싫어진다. 면밀히 살펴보고 탐구해야 벽을 오르던 부수던 할 텐데 말이다.

여태껏 마주했던, 결국 넘어섰던 벽들은 요즘 마주하는 벽들에 비하면 높이가 낮다. 그 벽들을 넘을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개발자에 한 발 한 발 가까워지고 있음을 안다.

최근에 마주했지만 결국 넘어서기 보다는 돌아가기를 택한 벽이 세 개 있다.
1. mac m1 기반인 내 pc의 파이참에 numpy 라이브러리는 설치했는데, import가 되지 않는 오류 -> 쥬피터 노트북으로 대체함
2. TodoTracker의 GUI 작업을 위해 PyQt를 사용하려 했지만, 파이참에서도 설치가 안 되고, QtCreator도 실행이 안 되는 오류 -> tkinter로 대체함
3. 쥬피터 노트북에서 실행한 tkinter 프로그램 창을 닫으면 커널이 죽는 오류 -> 창을 닫는 대신 python launcher를 종료하는 것으로 대체함

 

이 세 가지 오류를 직접 해결한다면 정말 편해질 텐데,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텐데. 아직은 아무리 검색해도 해결의 실마리조차 못 찾겠다. 어느정도 일반적인 환경에서 마주하는 보편적인 오류일 경우, 구글을 뒤졌을 때 친절한 해설서 또는 안내서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보다 조금 더 주변적인 환경이거나 조금 더 특수한 오류일 경우 구글에 있는 조각들을 주워 스무 고개를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훨씬 더 주변적인 환경이면서 동시에 훨씬 더 특수한 오류일 경우 조각을 줍는 일 자체가 스무 고개인 듯하다. 이 무슨 재귀함수도 아니고..

https://pixabay.com/images/id-2906556/


그렇다 해도 어느샌가 이 정도 벽쯤은 가뿐히 넘어서는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내 능력보다 약간 높은 벽들을 꾸준히 넘어오고 있으니까.

#define _PLS_NO_MORE_W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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